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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묶이지 않은 소녀의 마음, 그게 인간의 매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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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08면

“심청이가 16세였죠?”
영화배우 윤정희(65)씨가 확인하듯 물었다. 고전소설 『심청전』의 주인공 심청이 열여섯 어린 나이에 인당수에 뛰어든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상옥 감독님 하고 다른 영화를 찍을 때였어요. 촬영 도중 쉬면서 이야기들을 하는데, 다음 작품으로 ‘효녀 심청’을 하신다는 거예요. 제가 그랬죠. 감독님, 꼭 16세 배우로 심청이를 만들어야 합니까. 그 한마디였죠. 나를 배우로 쓰란 말은 안 했는데, 이후 저한테 출연 제안이 들어왔어요.” 당시 그는 28세였다. ‘효녀 심청’의 주연을 맡게 된 것은 물론,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효녀 심청’은 뮌헨 올림픽에 갔다.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상영회가 열렸다. 상영장에는 뉴욕에서 활동 중이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도 참석했다. 4년 뒤 부부로 맺어지는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15년 만의 영화 출연, 윤정희가 말하는 ‘여자, 60대’

28세 윤정희 vs 16세 심청이
윤정희씨가 영화 ‘효녀 심청’(1972년 작)의 캐스팅 에피소드를 들려준 건 25일 중앙SUNDAY와의 만남에서다. 이날 낮 그는 새 영화 ‘시’의 촬영을 시작했다. 주인공인 60대 여자 ‘미자’를 연기한다. ‘효녀 심청’을 찍던 20대의 윤정희가 그랬듯, 60대의 윤정희도 배우라는 일을 나이에 묶어두려 하지 않았다. “배우는 인간을 그리는 일이잖아요. 인간이 10대, 20대만 있나요. 저는 70대가 돼도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할 겁니다. 이번의 ‘시’처럼요.”

나이에 얽매둘 수 없는 건 배우만이 아닌 듯했다. 영화 주인공 ‘미자’를 두고 그는 “마음은 소녀 같은 인물, 그래서 매력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소녀의 마음을 지닌 60대 여자라니, 알 듯 말 듯하다. “어머님한테 한번 여쭤보세요. 아마 다들 그러실 걸요. 우리 나이가 되면 그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내 나이가 몇인데, 하지 않고 여전히 청춘이려니 생각하게 돼요.” 그는 외동딸의 말도 옮겼다. “딸아이가 그래요. 우리 집에서 제일 어린 건 엄마고, 제일 어른인 건 자기라고.”

영화 속의 ‘미자’는 딸만 둔 것이 아니다. 딸이 맡기고 간 손자를 혼자 키운다.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한다. 이런 ‘미자’가 어느 날 문화원에서 시를 가르친다는 광고를 보고,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던 시 쓰기에 도전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줄거리다. 각박하고 고달픈 시대에, 평균보다 더 고달플 미자의 삶에 과연 시는 어떤 의미일까. 배우는 “감독이 답할 몫”이라며 구체적 영화 내용에는 말을 아꼈다. 완성된 영화로 답할 몫이라는 얘기다.

15년 만의 새 영화 ‘시’를 찍고 있는 윤정희씨를 25일 만났다. 신동연 기자, 장소협조=서울프라자호텔

영화보다 음악과 먼저 사랑
얘기는 어느새 미자와 시에서 윤정희와 음악으로 바뀌었다. 배우가 되기 전 어린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유치원 때부터 무용·음악 하고 같이 살았어요. 중·고교 때도 합창반·무용반을 했고요. 습관이 공부할 때도 클래식을 듣는 거였어요. 영화 촬영 때는 차 안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잖아요. 바흐니 모차르트니 카세트를 사서 듣는 게 기다림 중 즐거움이었죠. 음악 없이는 못 살아요. 백건우씨보다 제가 더 음악을 좋아하죠.” 반대로 “나보다 백건우씨가 영화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TV를 볼 때도 저는 주로 뉴스인데, 남편은 늘 영화예요. 그래서 제가 영화를 할 때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디어도 많이 얻죠.” 그는 이런 점을 두고 “서로 쿵작이 맞는다”고 말했다.

음악에 더 진한 사랑을 느꼈던 그가 영화배우가 된 건, 듣고 보니 소설 때문이다. 작가 김내성의 장편 『청춘극장』이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오유경’(『청춘극장』여주인공 이름)이 대단한 인기였어요. 그때는 보고 싶다고 책을 다 사보는 시절이 아니었죠. 도서관에서 빌려서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었어요. ‘오유경’의 매력에 저도 빠졌죠.” 그의 데뷔작이 바로 이를 영화로 옮긴 ‘청춘극장’(67년 작)이다. 직전에 영화사는 거금 50만원을 내걸고 신인을 주연에 공모했다. 1200대 1의 경쟁을 뚫고 발탁된 것이 바로 윤정희씨였다. ‘청춘극장’의 성공으로 단박에 스타 대열에 합류한 그는 이후 약 300편의 영화에 주연했다.

그가 데뷔한 60년대는 한국 영화의 손꼽히는 황금기였다. 주연급 스타들은 한 해 수십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러니 하루에도 서로 다른 촬영장을 옮겨 다니며 여러 편의 영화에 동시에 출연하는 것이 예사였다. “저도 많을 때는 다섯 편, 보통 하루에 두세 편을 찍었죠. 그런데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지만, 제가 스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내가 카메라 앞에서나 배우지, 집에 오면 큰누나(그는 6남매의 맏이다)고, 부모 앞에서는 자식이고 그랬죠. 또 친구들과도 그냥 친구였고.” 그렇다고 팬들까지 똑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당시에도 열혈팬의 열기는 만만치 않았다. “집 앞에 학생들이, 아저씨들이 와 있곤 했죠. 종이에 혈서를 써온 분도 있었고. 제대로 못 돌아다녔어요. 조용한 생활이 그리웠죠.” 74년 유학을 위해 프랑스로 떠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근데 참 이상하죠. 유학 가서도 (한국에 틈틈이 돌아와) 작품을 했는데, 배우라는 역할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충무로 황금기를 명감독들과 함께
유학과 결혼을 은퇴의 구실로 삼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유학 갈 때도 영화를 그만둔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영화를 공부하러 간 것이기도 했고. ‘윤정희’가 영화이름(데뷔하면서 직접 지은 이름이다)인데 ‘윤정희’를 지켜야죠.” 그의 본명인 ‘손미자’는 놀랍게도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과 같다. “아버지가 참 멋쟁이셨어요. 맏딸인 저를 늘 유학 보내겠다고 하셨죠. 당시에는 ‘자’로 끝나는 이름이 유행이기도 했고, 외국에서도 부르기 쉬우라고 지으신 이름이에요.”

유학 얘기에서 외국 배우 얘기가 나왔다. “저는 잉그리드 버그먼이 참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늦게까지 연기를 했다는 점이 더 그렇죠.” 버그먼은 70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거장 감독 잉마르 베리만과 찍은 ‘겨울 소나타’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이 64세 때다. 67세에 찍은 마지막 작품에서는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를 연기해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국내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카사블랑카’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20대 후반의 작품이다. “아름다움이야 그 나이 때에 아름다우면 됐죠.”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그는 이름난 감독들과 고루 작업을 했다. 가장 많은 작품을 함께한 사람은 김수용 감독이다.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이 원작인 ‘안개’를 시작으로 ‘야행’ ‘화려한 휴가’ 등 대담하고 실험적인 영화를 거듭 했다. 그는 “저하고 너무 호흡이 잘 맞았다”고 했다. 고(故) 신상옥 감독과도 ‘내시’ ‘이조여인잔혹사’ 등 여러 작품을 함께했다. “그분도 참 편안해요. 들판에 말을 풀어놓듯 카메라 앞에 (배우들을) 풀어놓아요. 그렇게 나오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다 받아줬죠.” 올 초 세상을 떠난 유현목 감독과 찍은 ‘분례기’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유현목 감독님은 연출 방법이 또 달라요. 그분은 (같은 장면의 연기를) 굉장히 많이 시키셨죠.”

‘연기하지 않는 연기’ 새 도전
그는 이번 영화 ‘시’로 처음 함께 작업하는 이창동 감독에도 믿음을 드러냈다. “얼마나 철저하고 꼼꼼한지, 예술가로서 책임감이 대단해요.” 영화 ‘시’는 그에게 15년 만의 신작이다. 직전까지 가장 최근의 작품은 94년 개봉한 ‘만무방’(염치없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우리말)이었다. 밤낮으로 국군·인민군이 번갈아 찾아오는 극한적 상황에서 처절하게 생존하는 과부를 연기했다.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몬트리올 영화제에도 초청됐다.

이후로도 그는 영화상·영화제 등을 통해 최근 10여 년간 한국 영화가 이뤄온 도약을 지켜봤다. “청룡영화상은 한 10년 동안 심사위원을 했죠. 참 고마운 기회죠. 좋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으니. 또 요즘은 DVD도 있잖아요. 파리에는 DVD로 가져가서 봤죠.” 그렇게 보면서 기대를 갖게 된 젊은 후배 연기자들도 적지 않다. “‘플란다스의 개’의 배두나, ‘내 마음의 풍금’의 전도연,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 새 영화 ‘시’를 함께하는 이창동 감독에 대한 신뢰도 작품이 바탕이다. “감독으로도 좋고, 인간으로도 좋아요. 참 진실성 있고 순수해요.”

이창동 감독은 이제껏 선보인 영화마다 탄탄하고 극적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를 이끌어냈다. ‘초록물고기’의 한석규씨를 시작으로 ‘박하사탕’ ‘오아시스’의 설경구·문소리씨, ‘밀양’의 전도연·송강호씨가 그랬다. 이번의 ‘시’는 이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윤정희씨는 이 감독과의 작업에 이런 기대를 밝혔다. “모든 연기자한테 ‘연기’를 하지 말라고 해요. 자연스럽게, 보통 생활하는 것처럼 하라는 거죠. 퍽 힘들 테지만, 여태까지의 윤정희가 아닌 새로운 윤정희가 이 영화에 나올 것이라고 저도 기대를 합니다.” ‘시’는 앞으로 3개월여의 촬영과 후반작업을 거쳐 내년 5월 개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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