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 달라졌다] 7.끝 낮엔 사원, 밤엔 사장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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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A호텔 홍보실 김모 (31) 대리는 지난해 10월부터 저녁에는 '남 모르게' 외국인 통신업체에 다니고 있다. 낮엔 호텔에서 일하고 퇴근후와 주말에는 이 회사에서 영문 자료를 한글로 번역한다.

B그룹 인사과 박모 (35) 과장은 명함이 2개다. 회사엔 적을 걸어둔 채 최근 인력관리회사를 차린 것. 그는 "아직 어설픈 단계지만 저녁에는 업계 사람들을 만나 사업정보를 귀동냥하거나 일감을 구한다" 고 말했다.

'낮엔 사원, 밤에는 사장님' .평생직장의 꿈이 깨지고 고용불안이 심화되면서 자기계발 차원을 넘어 본격적으로 부업전선에 뛰어들거나 독립을 준비하는 새 풍속도가 직장가에서 고개들고 있다.

박주관창업컨설팅㈜에 따르면 창업준비 직장인을 위한 창업도우미컨설팅 프로그램 참가자는 한달 평균 5~6명. 지난해 이후 부쩍 느는 추세다.

가장 관심이 많은 부업은 '장사'. 현재 직장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와 관련된 특기를 살리려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최종 목표는 '독립' 이다.

이런 분위기는 근무 행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H그룹 계열사의 韓모 (40) 차장은 지난해 가을부터 퇴근시간만큼은 '칼' 이다. 그전에는 자진해서 남거나 퇴근후 동료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바로 퇴근한다. 아내와 함께 사당동 근처에 조그만 생맥주집을 차린 것. 그는 "지금은 저녁에만 거들지만 언제라도 사표를 내고 전업으로 매달릴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고 말했다.

이런 변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아무래도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다. 그만큼 부작용이 만만찮기 때문. L사 인사담당 羅모 차장은 "근무효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직원이 있어 사연을 알아보니 부업을 하고 있어 일단 경고를 줬다" 고 말했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심지어 사내정보나 영업 비밀 등을 이용, 개인 이익을 챙기는 사례도 있다. 중견 무역업체에 다니던 李모씨는 자신이 알던 철강수입루트 등 관련 정보를 챙겨 친지 명의로 개인회사를 세운 뒤 여기를 통해 자신이 몸담은 회사의 철강수입을 대행하다가 구설에 올라 최근 회사를 떠났다.

각 기업들은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중이지만 문제는 대부분 쉬쉬하기 때문에 파악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파악한들 바로 해고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

L사는 사규 복무규정에 '타업종 종사' 조항을 만들어 "사원이 회사 허가없이 자기사업을 하거나 타업무에 종사해서는 안된다" 는 내용을 넣었다. 경중에 따라 견책.감봉.정직하고 심한 경우 권고사직까지 가능토록 돼 있다.

노동연구원 선한승 연구조정실장은 "조직원들이 다른 일에 양다리를 걸치거나 회사일과 무관한 자신의 능력개발에만 신경을 쓰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며 "기업들은 고용조정후 남은 직원들이 불안감을 씻고 회사에 전념할 수 있는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H사 인사 담당자는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데 대해 할 말은 없지만 본인의 업무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내 신뢰감을 붕괴시키는 등 문제점이 적지 않다" 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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