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직 전문기자리포트]낭비.비리 키우는 입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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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 건설엔지니어링 업계는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이후 일감이 뚝 끊겼던 차에 건설교통부가 국도 (國道) 설계용역 4백65억원어치를 한꺼번에 발주했기 때문. 당시 생존이 절박했던 업체들의 수주경쟁에 불꽃이 튀었다.

입찰은 7월초 시작해 11월에야 끝났다.

담당공무원은 "다른 업무를 볼 겨를도 없이 입찰서류 평가에 매달렸다" 며 힘들어 했다.

업계는 더욱 괴로웠다.

1차서류 (사업수행계획서) 작성에 업체마다 1천만원이 넘게 들었고, 2차서류 (기술제안서)에는 2천만~3천만원이 더 소요됐다.

이번 입찰에 쓴 업체의 경비는 모두 50여억원, 총발주액의 10%를 넘는 액수였다.

이 서류는 입찰절차 후 곧 쓰레기가 됐다.

업계.당국 모두 상당한 돈.행정력을 낭비했다.

낙찰 결과 또한 뜻밖이었다.

한 건도 못딴 업체가 수두룩한데 서너건씩 굵직한 걸로 골라 딴 업체가 여섯 개나 됐다.

특이하게도 기술사 몇명이 모인 나눠먹기식 업체, 공무원출신 기술사가 있는 업체, 담합.뇌물비리로 사법처리를 받았던 기술사.업체들이 대체로 일을 많이 땄다.

건설엔지니어링 업계에 오래 몸담은 S씨는 "입찰평가기준이 겉으론 객관적이고 공정한 듯하지만 실상은 틈이 많고, 일부 업체.공무원이 이를 악용하기 때문" 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예를 들어 최근 3년간 설계실적건수에 따라 차등점수를 주는 기술자 자격.경력 평가기준 (배점의 50%) 은 한 건을 착실하게 설계한 기술자보다 여러 건을 동시에 겹치기로 설계한 기술자에게 점수를 많이 주게 돼 있다.

이번에 4건을 딴 P엔지니어링 J기술사는 97년에 7건, 24억원어치를 딴 K엔지니어링 C기술사는 5건을 설계했고, 분명 정상이 아닌 실적인데도 이번에도 높은 평가점수를 받은 것이다.

이들은 올해 또 겹치기 설계를, 내년엔 더 많은 일을 딸 수 있다.

때문에 업계엔 덤핑.로비.담합 등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적을 만들려 하거나, 그게 안되면 실적이 많은 기술자를 고액으로 스카우트하는 풍토가 만연한다.

경력점수 배점은 더욱 산술적이다.

경력 20~30년인 기술사는 만점이고, 35년을 넘거나, 10~15년인 기술사는 2점을 감점 당한다.

보통 총점 1~2점 차이로 당락이 결판나는 걸 고려하면 너무 큰 점수차인 것. 결국 '만점기술사' 는 입찰 때마다 서류상으로만 회사를 옮기고, 당국은 모르는 채 점수를 준다.

가격입찰단계에 비리 가능성이 있다.

사전에 평가점수를 알려주고, 순위에 따라 다른 최저투찰가격 한도로 입찰하는 제도는 결국 예정가에 따라 1위 업체가 높은 가격으로, 또는 후순위 업체가 낮은 가격으로 붙이는 등 발주자 마음대로다.

때문에 업체는 예정가를 알려고 온갖 수단을 쓰다가, 안되면 흔히 담합을 하는 것. 감사원은 이번 용역발주과정에서 ^평가기준을 잘못 적용한 경우^계산 착오로 등위가 바뀐 경우^실적서류를 변조한 경우 등 평가오류를 상당수 적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담당공무원 스스로도 "평가기준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고 실토할 정도로 자의적인 입찰제도인 셈이다.

이처럼 건교부의 설계용역 발주방식은 발주자.계약자 모두를 애먹이고 더 나아가 부실설계.잠재비리를 유발하는 제도라는 지적이다.

한 기술자는 "기술보호를 구실로 공무원이 권익.실리를 챙기려는 입찰방식을 바꿔야 용역업계가 바른 길로 가고, 공무원이 비리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 단언한다.

대안은 간단하다.

어떤 업체라도 할 수 있는 단순설계용역은 복잡한 평가절차가 필요없다.

또 고도설계기법이 필요한 용역은 지금처럼 하위직공무원이 단기간에 평가하는 게 더욱 무리다.

전문기관평가에 맡기되 설계기법을 구체적으로 따지기보다 설계요소별 적용기술.기술자활용계획.예정가격을 따져 기술력.관리능력.가격 등을 종합평가하는 제도가 좋다.

그래야 저가투찰.비현실적 제안을 거를 수 있다.

여기에 평가실명제, 평가결과를 공표하는 시스템이면 된다.

음성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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