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가문의 막내, 형들 곁으로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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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그는 두 형이 죽은 후 명문 케네디가의 명성을 이어왔다. [AP=연합뉴스]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이 25일(현지시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부터 뇌종양으로 투병해온 그는 매사추세츠주 히아니스 포트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뉴욕 타임스는 “승리와 비극의 천칭 위를 오가며 미국 정치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케네디가의 아들이자, 미 상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입법가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케네디 의원의 사망 소식에 “가슴이 찢어지는(heartbroken) 심정”이라며 “우리 시대 최고의 상원의원을 잃었다”고 애석해했다. 그는 케네디 의원을 모든 미국인의 시민권 확대와 보건·복지 향상을 위해 애쓴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케네디 의원은 1932년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에서 미국에서 가장 유력한 집안인 케네디가의 4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둘째 형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던 6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지만 술을 즐긴 데다 바람둥이 기질로 스캔들에 시달려 왔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한때 40대에 암살된 두 형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뒤를 잇는 대통령 후보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69년 발생한 ‘차파퀴딕 스캔들’에 발목이 잡혀 백악관 입성의 꿈은 접어야 했다. 이 스캔들은 매사추세츠주 차파퀴딕섬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던 케네디 의원이 형 로버트의 여비서와 차를 타고 가던 중 다리 난간을 받고 강에 추락, 자신만 간신히 살아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세간의 의혹을 증폭시키며 80년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 그를 떨어뜨렸다. 이후 의정활동에 전념한 그는 베트남전을 반대하고 인권 문제 등에 천착하는 등 진보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의 후견임을 자임하며 그의 승리에 기여했다.

◆DJ와 인연 각별한 ‘친한파’=그는 미국 내 대표적인 친한파 인물로도 유명하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71년 김 전 대통령의 방미 때 처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 40여 년간 정치적 동지로서 친분을 쌓아왔다. 그는 80년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됐을 때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 전 대통령이 82년 12월 미국 망명길에 오르자 워싱턴공항까지 직접 마중 나갔다. 나아가 85년 김 전 대통령의 귀국 때까지 그의 안전을 보장해 줬다. 이런 인연으로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이날 케네디 의원의 유족 앞으로 애도 서한을 보냈다. 케네디 의원은 90년 6월에도 동료 의원 10명과 함께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투옥된 민주화 관련 인사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하현옥·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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