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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74> 디지털로 복원되는 문화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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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면

최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지난달 24일 고려실이 신설됐습니다. 불교와 청자의 국가, 고려시대가 번듯한 방을 얻었습니다. 고려실 복판에 대형TV가 한 대 있습니다. 무심코 스쳐갈 수 있으니 빼놓지 말고 보세요. TV에선 고려 왕궁 만월대 영상이 흐릅니다. 만월대는 조선시대 경복궁과 같은 곳이죠. 1362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지만 옛 자료와 유물을 조합해 디지털로 복원한 겁니다. 요즘 문화재 디지털 복원이 주목 받고 있습니다. 과학과 문화의 만남, 소위 CT(Culture Technology)의 본보기입니다.

박정호 기자

고고학과 첨단기술이 만나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로 시작하는 옛 가요 생각나시죠. 제목은 ‘황성 옛터’. 이 노래를 처음 불렀던 이애리수씨가 올 3월 말에 돌아가셨죠. ‘황성 옛터’가 바로 만월대 터입니다. 노래에서 ‘황성’은 한자로 ‘황폐한 성(荒城)’이지만 원래 고려 왕궁은 ‘황제의 성’(皇城)이었답니다. 만월대는 황성이 폐허가 된 뒤 조선시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려는 스스로 황제국을 자처할 만큼 자부심이 컸습니다.

디지털 만월대 제작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2007년 5~11월 남북 역사고고학자 50여 명이 공동 조사한 ‘개성 고려 궁성 유적 발굴’ 결과가 토대가 됐습니다. 당시 발굴단에 디지털 복원 전문가들이 동참했습니다. KAIST 문화기술대학원 팀이었죠. KAIST팀은 발굴 현장에서 만월대의 규모와 배치를 파악하고, 이후 발굴된 유물 등을 기반으로 ‘디지털 만월대’를 제작했습니다. 폐허로 방치됐던 역사적 공간이 첨단기술의 힘을 얻어 제 모습을 찾은 것이죠.

KAIST팀은 개성에 3차원 스캐너 두 대를 가져갔습니다. 발굴 유물 하나하나를 계측하고, 그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스캐너가 영어 명칭이라 개성에 갖고 들어갈 때 ‘3차원 형상 계측기’라는 우리말로 옮겼다고 합니다. 북한 측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든 단어인 셈이죠.

‘디지털 만월대’는 화려합니다. 송악산 아래 고려 왕궁의 주요 건물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했습니다. 특히 중심 궁궐 ‘회경전’이 눈에 띕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의 근정전과 비슷한 기능을 했던 곳이죠. 고려시대 중국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회경전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동서 양 계단이 붉게 칠해져 있고 난간은 웅장하고 화려하여 모든 전(展) 중에 제일이다.”

600여 전에 사라진 고려의 자존심, 만월대. 지금은 그 자리만 쓸쓸히 남은 곳. 게다가 남북 분단으로 쉽게 찾아갈 수 없는 곳. 디지털 복원이나마 그 화려했던 과거로 한번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보시겠습니까. 만월대 현장에 있었던 KAIST 선임연구원 박진호씨의 소회는 이렇습니다. “만월대가 있을 당시 한반도는 왕건에 의해 하나된 나라였다. 만월대를 생각하며 통일된 미래의 한국을 떠올려봤다.”


우리가 모르던 석굴암을 보다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 옆방 통일신라실도 한번 둘러보셔요. 전시장 구석 한편에서 ‘디지털 석굴암’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 완성된 겁니다. 만월대보다 아무래도 접근하기 쉽고, 자료도 많아 영상 자체가 더욱 역동적입니다.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중 국보’이지만 우리가 그 본체를 완벽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석굴암 바로 앞에 두꺼운 유리를 설치했기 때문이죠. 석굴암 내부로 들어가 신라인의 예술혼과 불심을 통째로 느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석굴암에는 잘 알려진 대로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모두 39체의 불상이 조각돼 있습니다. 석굴 내부는 총 360개의 판석이 빈틈없이 연결돼 있습니다. 신라의 건축·수리·기하학·종교·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걸작입니다. 우리는 그 유장한 석굴암의 일부만 만끽할 수 있는 것이죠. ‘디지털 만월대’가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문화재를 복원한 것이라면 ‘디지털 석굴암’은 접근이 제한된 오늘의 문화재를 새롭게 재연한 셈입니다.

‘디지털 석굴암’을 보면 석굴암의 미학적 가치, 건축적 우수성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석가여래불상부터 석굴 외부 흙과 돌이 쌓이는 과정까지 석굴암의 축조 과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길 수 있는 모양입니다. 시쳇말로 ‘에지 있는’ 석굴암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화 찍듯 시나리오 쓰고 촬영하고 …

문화재 디지털 복원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만만한 작업이 아닙니다. 석굴암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디지털 석굴암에도 KAIST 문화기술대학원 팀이 참가했습니다. 참여 인원이 31명에 이르네요. 에피소드를 또 하나 소개합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석굴암에는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상태입니다. 제작팀에는 딱 사흘의 시간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스님들의 저녁 예불이 끝나고 다음 날 새벽 예불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딱 6시간, 즉 총 18시간이 허락됐답니다. 당연, 사전 준비작업이 철저했어야 했겠죠.

‘디지털 석굴암’ 제작은 영화 만들기와 유사합니다. 첨단 디지털 기술을 120% 활용하되, 역시 땀냄새 풍기는 아날로그 노고가 수반돼야 한다는 얘기죠. KAIST 박진호 선임연구원의 얘기를 또 인용합니다. “BBC·NHK처럼 우수한 영상기술과 인력이 투입된 해외 유명 문화유산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질투를 느꼈습니다. 한국의 ‘넘버 원’ 유산인 석굴암의 고화질(HD) 촬영과 주제 영상이 결정되는 순간, 선진국의 영상기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의 영상 콘텐트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첫 단계는 시나리오 제작입니다. 석굴암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조사해 작품 안에 들어갈 얘기를 골랐습니다. 시나리오 집필진이 전체 밑그림을 잡았죠. 얘기 구성(스토리텔링)에 관심이 큰 소설가 김탁환씨와 국립중앙박물관 전문가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시나리오 탈고 이후 본격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석굴암 내부 촬영이죠. HD 동영상 카메라, 3차원 스캐너, 고화소 카메라가 석굴암의 구석구석을 훑었습니다. 영화 ‘남녀상열지사 스캔들’ ‘음란서생’의 하성민 촬영감독, ‘살인의 추억’에 참여한 김욱 조명감독 등이 동참했죠.

마지막으로 디지털 합성입니다. 영화로 치면 후반 작업이죠. 기존에 수집한 각종 데이터를 결합하는, 이른바 컴퓨터 그래픽의 ‘마술’을 동원했습니다. 작품 초반, 석굴암 내부로 카메라가 전진할 때 석가여래불의 광배(光背·불상이나 예수상 배후의 광명) 너머로 밝은 빛이 쏟아지는 장면은 모두 컴퓨터 그래픽 덕분이랍니다. 지금까지 관람객의 육안으로 볼 수 없던 것을 카메라 렌즈와 디지털 기술이 대신 잡아낸 것이죠.

교육·게임 등 멀티 콘텐트로 활용

왜 지금 문화재 디지털 복원을 얘기할까요. 아시다시피 유·무형 문화재는 시간, 혹은 재난에 따라 원형이 훼손·소실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사라진, 혹은 앞으로 없어질 문화재에 대한 정보를 보존하자는 차원입니다. 일례로 2008년 화재가 난 숭례문의 복원은 기존의 디지털 정보나 아날로그 도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답니다. 지금은 색이 한참 바랜 고구려 벽화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는 것이죠.

비록 TV 화면이나 가상공간에 되살린 거지만 선조들의 찬란한 유산을 후세에 전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가상 고고학(Virtual Archaeology)’라는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정보기술(IT)과 고고학·역사학 등 인문지식이 결합한 모양새이기 때문이죠.

국내에서 문화재 디지털 복원은 2000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선보인 신라 왕경이 효시가 됐습니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디지털 가상기술로 재현했죠. 이후 백제 무령왕릉, 고구려 안학궁, 신라 황룡사 재현 등이 잇따랐습니다. 우리의 복원 역량이 쌓이면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 베트남 세계문화유산, 페르시아의 옛 수도 페르세폴리스 등도 디지털로 되살아났습니다. 문화와 디지털의 한국을 외국에 널리 알린 것이죠.

디지털 문화재의 쓰임새는 다양합니다. 영화·애니메이션·e-북·게임·서적·게임·사이버 박물관 등 멀티 콘텐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원 소스 멀티 유즈’가 가능합니다. 일례로 영화 ‘왕의 남자’에 나왔던 한양 풍경, 경복궁 모습, 왕실 의례 등은 옛 자료를 근거로 디지털로 만든 영상이랍니다. 향후 다른 영화에도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이죠.

교육적인 효과도 큽니다. 사라진, 혹은 망가진 옛 문화재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린 우즈베키스탄 중동부에 있는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를 볼까요. 디지털 기술로 색이 한참 바랜 그림을 선명한 색채로 재현했습니다. 깃털관을 쓴 두 명의 고구려 사절이 눈에 띕니다.

문화재 디지털 복원은 현재 개화 단계입니다. 회화·조각·건축·서적 등 활용 분야가 무한합니다. 옛 사람들이 먹고, 자고, 입었던 생활상을 구현한 사이버 박물관도 가능합니다. 문화 콘텐트의 원형인 셈이죠. IT 강국, 우리의 첨단기술력이 고색창연한 문화재 분야에서도 만개하기를 기대합니다.

뉴스 클립에 나온 내용은 조인스닷컴(www.joins.com)과 위키(wiki) 기반의 온라인 백과사전 ‘오픈토리’(www.opentory.com)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세요? e-메일 기다립니다. newscl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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