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322.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제7장 노래와 덫

그는 집을 나서서 포구 쪽을 겨냥하고 걷기 시작했다. 명분이라고는 담배씨만큼도 없는 여자가 돌아오긴 했지만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을 이웃에서 눈치챈다 하더라도 도덕적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잠시 그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었다.

차제에 보란 듯이 차마담을 찾아갈까 했으나 이 순간만은 내키지 않았다. 포구에는 문을 열어 둔 선술집이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육십평생이 가깝도록 탈없이 걸어왔던 걸음걸이가 평소 같지 않았다 그렇게 취한 것도 아닌데, 흡사 침대 시트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하반신이 제멋대로 휘청거렸다.

그는 자신이 갈등과 고뇌의 와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슴 속은 찢어질 듯 고통스럽거나 울울하지가 않았다. 그녀가 나타난 것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등 뒤로부터 인기척을 느꼈다. 힐끗 돌아보았더니 뒤따라오던 배말자씨가 바로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것이 바로 가로등 아래였기 때문에 대면한 지 처음으로 그녀의 면상을 명료하게 분별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변씨는 또 다른 분노가 가슴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녀는 코와 눈을 성형수술한 흔적이 너무나 뚜렷했다.

쌍꺼풀 수술은 아직 완쾌되지 않아 눈 가장자리가 불그스름하게 멍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변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멀쩡한 남편을 두고 집을 뛰쳐나갔던 계집이 객지에 나가서 고작 한다는 일이 성형수술이란 말인가.

그렇게도 심지 없고 분수 모르는 계집과 평생해로를 하겠답시고 혈육까지 두었다는 것이 스스로의 발등을 도끼로 찍고 싶도록 모멸스럽고 후회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배말자씨의 따귀를 눈에서 번갯불이 튀도록 갈겨 주고 말았다. "왜? 불두덩이 근질거리냐? 그렇다면 지금까지 놀아났던 놈을 찾아가야지 왜 나를 따라와? 그 놈 보기 좋으라고 납작하던 콧등을 고래등같이 세우고 눈깔까지 가죽이 찢어져라 벌려 놓았네. 니 같은 년을 내가 쓸개빠진 놈이라 한들 순순히 접수하고 과거사 잊어버리자 하고 방문이라도 덜컥 따줄 줄 알았냐? 방문은커녕 집 근방에 얼씬거렸다간 그 잘난 가랭이를 아예 못 쓰도록 찢어 놓을 테니깐. 내 성질 더러운 건 아직까지 잊지 않았겠다?" 변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항상 찾아가기에 이골이 났던 선술집의 방향이 어디쯤인지 갑자기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목청을 가다듬어 내뱉는 배말자씨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내가 누구하고 놀아났다고 그 야단이야요?" "두 눈이 얼음바닥에 자빠진 황소 눈깔처럼 부릅뜨고 있는 서방놈 몰래 야반도주한 년이 할 말이 있다? 이년, 이제 보니까 가랭이는 고사하고 주둥이부터 찢어 놓을 년이네?" 다시 귀쌈을 향해 날렵하게 손바닥을 날리는데. 자지러진 배말자씨는 상반신을 교묘하게 움츠려 손찌검을 피했다.

헛손질한 변씨는 그러나 손찌검할 가치조차 없는 그녀를 남겨 두고 걷기 시작했다. 마디에 옹이까지 박혔다더니 자신의 팔자는 왜 이토록 뒤틀리기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차마담을 맞아들여 늙은 홀아비 신세나마 모면하자는 소박한 바람조차 좌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옥죄고 들었다. 그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포구의 불빛 쪽으로 휘청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우선 눈에 띄는 포장마차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혼자도 잠깐이었다.

형식이 아부지. 얘기 좀 합시다. 그런 소리가 들리는가 하였더니, 염치 없는 배말자씨가 휘장을 들치고 서 있었다.

소주를 주문해서 불과 두 컵째를 마시고 있었던 참이었다. 참고 참아서 배꼽노리 아래로 꾹꾹 눌러 놓았던 분노와 울분이 다시 한번 울컥 치밀어올랐다.

입안에 물고 있던 소주를 칵 뱉어 낸 변씨가 일어섰다. 부곡에 있던 한씨네 행중을 불러올린 사건의 단초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