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원칙으로 돌아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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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면 죽었다 깨어나도 시키는 대로만 한다.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심은 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쓱 봐서 자기 생각에 꼭 필요하다 싶지 않은 공정은 과감하게 (?) 건너뛰어 버린다.

얼른 보기에 일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융통성이 있어서 좋은 것 같지만 뒤에 가서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

이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한 일본 기업인이 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의 생활방식과 태도에는 그같은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속도주의.편법주의.목표지상주의 등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요즘 우리는 너나없이 과정과 절차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소홀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민족성.국민성부터가 그렇다고 확대해 자기비하할 일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면 우리도 어느 사회, 어느 민족 못지 않게 치밀하고 찬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대충주의를 비웃던 일본인들도 자개장 하나만을 보고는 그 치밀함과 정교함, 그리고 그런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끈기와 성실성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런 민족이 편법주의와 속도주의.목표지상주의, 그리고 불성실과 부정으로 도심의 대교와 백화점마저 폭삭 주저앉게 하고 있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독재정치로 얼룩진 근세사가 빚어낸 슬픈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여야가 '진흙밭 속 개싸움' 을 벌이고 있는 것도 정치야말로 과정과 절차가 중요하다는 점을 제대로 모르는 탓이다.

지난해 5월 12일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정보는 국력이다' 라는 안기부의 새 부훈석 제막식에서 "이제 안기부는 정권을 위해서도, 국민회의나 자민련을 위해서도 일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국가를 위해 일해달라" 고 강조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난날 정보기관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사람의 말이라서 '그래도 이번에는…' 하는 기대를 가질 만했다.

또 헌정사도 벌써 반세기가 됐고 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 마당에 국가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화와 같은 기본적인 민주화를 기대 안 한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529호실 사태에 청와대는 어떤 식의 대응자세를 갖는 것이 바람직했을까. 그 방이 정보위 자료열람실인지 정치사찰 분실인지의 명확한 시비가림은 뒤로 하고 즉각 "그런 방이 있었느냐. 국민의 정부는 정보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짓도 하지 않겠다.

529호실의 용도는 여야합의로 바꾸자. " 선선히 이랬더라면 바로 자신들이 여당때 만든 방을 가지고 '한건' 하려 했던 한나라당이 맥빠지고 머쓱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국민은 현 정부의 민주의지를 더욱 더 믿지 않았을까. 이회창 (李會昌) 총재도 그렇다.

"법을 공부하고 법과 함께 살아 온 사람으로서 원칙과 정의를 지키고자 노력했지만 정의가 실종되고 법의 원칙이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고뇌의 결단이었음을 이해해 달라. "

이렇게 변명했지만 대법관.감사원장을 지내고 유력한 대통령후보이기도 했으며 별명마저 '대쪽' 인 사람이 법규위반인 줄 뻔히 알면서 망치로 입법부의 방을 부수는 걸 진두지휘한 후 이해해 달라고? 이렇게 되면 과연 누가 법과 원칙을 지킬 것인가.

다른 모든 국회의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고 해도, 의혹을 못 푸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이 사회에 목적을 위해 수단의 정당성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고 말렸더라면 그는 '과연!' 이라는 감탄을 샀을 것이고 그와 한나라당의 인기도 올라가지 않았을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후 하느님마저 '단 열 사람의 의인만 있었더라도…' 하는 한탄을 한 것처럼 원칙과 이상에 철저한 큰 정치인이 단 몇 사람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목마름을 강하게 느낀다.

병자호란때의 3학사나 그 숱한 당쟁때의 논란을 통해 보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은 원칙과 이상, 명분과 대의를 현실과 실리, 융통성과 목적 이상으로 중시했었다.

그런 우리가 볼과 최근 1세기 동안의 간난 속에서 이렇게 실리주의.편법주의.목표지상주의자로 변해 버렸다.

실리주의.편법주의.목표지상주의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원칙주의, 과정의 가치존중은 인간세계에서만 있는 현상이며 그것을 지킴으로 해서 인간은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유승삼 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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