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9년에 묻는다]3.다시 종교의 시대는 오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막 꽁무니를 보이고 있는 20세기는 결코 '종교의 세기' 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서구의 관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구 2천년 문명사 정신의 헤게모니를 틀어쥐고 있었던 기독교는 금세기 들어 점진적인 쇠락세를 면치 못했고, '기독교 후기 (the post Christian era)' 를 예언하는 음성들이 공공연했다.

극으로 치닫는 과학기술의 세계가 전래의 종교인문적 상상력을 대체한 탓도 있겠지만 기성 제도권 기독교가 서구의 세속적 계몽과 경합할 수 있는 진정한 시대적 종교로 거듭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구 기독교의 퇴락은 근자 유포된 여러 포스트 (post) 주의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근대성 비판과 맥을 같이한다.

서구의 근대화는 과학적 진보사관, 자원 (資源) 으로서의 자연관, 합리적 개인주의 등을 토대로 눈부신 탈기독교적 기술문명세계의 산파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토양과 역사를 꾸려온 불교나 이슬람교 세력권에서는 여전히 종교가 삶의 자양분이자 뿌리깊은 터줏대감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기독교는 이른바 '축복과 부흥의 시대' 를 마감하고 이미 수년 전부터 수적인 감소현상을 보여왔다.

개화와 계몽의 선구였고,가난과 고통의 반려였으며, 정의와 평화의 상징이기도 했던 교회는 금세기 내내 나름의 사회적 가치와 지분을 선명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 어느 쪽의 가치도 선명히 내걸지 못한 채 고속의 시대적 추이와도 불협화음을 발하며 어정쩡한 걸음으로 21세기의 문턱을 배회하고 있다.

그 사이에 망령같은 매머니즘 (mammonism.배금주의) 은 첨단의 포장술로 무장하고 영성의 주변을 자본의 그림자로 포진한다.

이제 '자본과 함께, 자본을 넘어' 라는 구호를 구체화하지 못하는 한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그리 밝지 못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전통 속에서 속속들이 토착화된 불교는 특히 현대 한국의 근대화.민주화 도정에서 자신의 자리매김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계몽과 성장을 반 (反) 전통의 속도주의와 혼동한 이래 이 정적 (靜寂) 과 수행의 종교는 시대의 예각을 힘겹게 비껴가면서 바로 그 시대를 배우는 역설에 처하게 됐다.

돌진적 산업화와 변혁의 시대를 간신히 지나 보내고, 개신교의 다소 시끄러운 팽창주의도 시들할 무렵 전일적 자본주의의 체제 속에서 실존과 영성의 욕구에 늘 미진했던 현대인들은 불가의 정적주의와 그 느림의 미학에 다시 끌리고 있기는 하다.

근자 선수행 (禪修行) 이나 선가의 일화를 담은 책들이 호황을 누리는 것에서 시대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달라진 21세기적 실존의 요구에 능동적으로 응대하면서 새로운 종교성을 보양해야 할 과제는 비단 불교만의 것은 아니리라. 21세기의 우리 종교지형을 전망하면서 서구의 전철을 덧씌우고 싶은 유혹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현상적으로 유사한 종교경험에 있어서도 그 문화사회적 배경과 의미는 여러 가지로 갈라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는 오히려 당연하다.

서구에서는 기존의 제도권 종교가 담당해오던 사회통합 기능이 느슨해지면서 표면적으로 탈종교의 모습을 띤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글어진 제도권 종교의 네트워크 사이로 이른바 '틈새 종교성' 의 이합집산이 활발하다.

갖가지 신흥유사종교가 전근대와 탈근대의 지향을 나누어 가지면서 실험과 모색의 과정을 다소 선정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밀레니엄이 바뀌는 시점에서 집단무의식적으로 분출되는 종말론적 희원 (希願) 과 공포가 그 기저에서 한 몫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기성 종교의 교리에 대한 충량한 '믿음' 을 거부하고 여러 종류의 '영지 (gnosis)' 를 중심으로 주변부 종교인들이 재편되는 것도 이와 맞물린 현상이다.

한편 음악.영상.컴퓨터.가상현실 등 갖가지 첨단 기술적 환각을 매개로 기성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매니어의 지평도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우리의 사정은 꽤 완고한 편이다.

종교학자들도 현금 서구의 추세나 그 황량한 교회 이미지를 곧장 끌어와서 우리의 다음 세대에 투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종교적 정서와 행태, 그리고 그 역사적 배경이 너무나 서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구성에서만 해도 서구는 종교와 거리 두기를 통해 합리성과 과학적 객관성을 지향했지만, 우리는 수입된 기독교의 독특한 입지와 역할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토착종교의 운동성 자체가 우리 나름의 근대성을 모색하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마 향후 수십년간 서구의 추세와 상관없이 그 완고한 종교적 타성과 전근대적 상상력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기존의 종교제도가 균열하면서 틈새의 종교시장이 조금씩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할 것이고, 그 와중에 파행과 예시 (豫示) 의 징후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현금이 많고 또 가장 잘 모이는' 이 특이한 구심력 집단이

그 위상만한 사회적 성숙과 변혁의 구실을 맡아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심층근대성의 이념들을 종교 내적으로 체화 (體化) 해주지 않는 이상 사원 안팎의 소외에 무관심한 그 도저 (到底) 한 심리적 폐쇄주의를 허물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종교권은 그 전래의 권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고 계몽의 말미에 와 있는 세속의 여러 전문가 집단들이 준 (準) 종교적 지위를 누리면서 기성 종교들과 경합하게 될 것이다.

흔히 권력의 속성으로 '자기절대화' 와 '자기은폐성' 을 거론하지만, 소수의 진보적 음성과는 상관없이 절대다수의 종교인들은 그 '절대화된 은폐성' 속에서 매우 이기적으로 운신할 것이다.

세속적 계몽과 탈속적 구원이 교차하는 부분, 즉 성숙의 부분을 확산시켜야 한다.

이것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의 종교계가 나아가야 할 것이며, 크게는 졸속하고 미성숙한 근대성을 붙잡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 사회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어쨌든 종교 전체를 두고 '밝은 미래 운운' 할 수 있었던 때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낙심의 빌미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종교는 그 운신의 길에서 거시적 조망으로 고갈되지 않는 나름의 묘 (妙) 를 지니기 때문이다.

김영민 한일장신대교수.철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