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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결한 지젤이 창녀가 됩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8호 10면

#장면1.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공인회계사 공부를 하다 발레에 빠진 대학생이 있었다. 제대로 배우기 위해 뉴욕으로 가겠다고 하자 가족들은 “석 달 후면 제 발로 돌아올 거야”라며 코웃음을 쳤다. 각종 보조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마침내 줄리아드를 졸업했다. 유럽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에서 춤을 추던 청년은 1987년 유니버설 발레단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무대 위의 '급진주의자' 서울발레시어터 제임스 전·김인희 부부

#장면2. 매일 무용학원을 구경 가던 가난한 소녀가 있었다. 그런 모습을 2년 동안 지켜보던 원장은 돈을 받지 않고 춤을 가르쳤다. 예중 3학년 때 영국 로열발레단 입학 자격을 얻고 예고 2학년 때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장학생이 된 소녀는 도중에 귀국 보따리를 싸야 했다. 장학금은 받았지만 집안 형편은 한 달에 5~6켤레 바꿔야 하는 토슈즈 값도 대기 힘들었다. 대학은 포기하고 84년 유니버설 발레단 창단 멤버가 된다.

#장면3. 7남매 중 막내인 발레리노와 5남매 중 막내인 발레리나는 89년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고민 끝에 아기 대신 발레를 택한다. 부부가 함께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도 활약했던, 서울발레시어터(SBT)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50)과 김인희(46) 단장 얘기다. 도대체 발레가 무엇이기에.

“100원짜리 동전만 한 발톱에 내 몸 전체를 올려놓습니다. 아프지요. 하지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몸을 보여 주기 위해 무용수들은 그 뼈를 깎는 아픔을 기꺼이 참아냅니다. 발레 공연을 보고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면 아마 그런 마음이 전달돼서일 겁니다.”(김인희)

그런데 이들 부부에겐 또 다른 꿈이 있었다. 서양의 고전 발레가 아닌, 자신들만의 발레로 외국에 수출도 하고 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겠다는. “아무리 연습하고 또 아무리 박수를 받아도, (서양인을 위한) 서양 작품으로는 제가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우리 발레가 있어야, 우리 춤을 추어야 외국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김인희)

“틈틈이 안무를 짜 보곤 했어요. 어느 날 후배들하고 ‘창작 발레단 하나 만들어 볼까’ 하다가 덜컥 연습장 계약부터 했죠. 이제 15년 됐으니 ‘중학생’으로 자란 거죠.”(제임스 전)

95년 창단 첫 작품 ‘현존(Being)’ 이후 서울발레시어터는 ‘백설공주’ ‘호두까기 인형’ 등 대중을 위한 작품은 물론 ‘현존 2, 3’ ‘봄, 시냇물’ ‘손수건을 준비하세요’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예술성 높은 무대로도 주목받았다. 특히 2001년 선보인 ‘Line of Life’는 한국 최초로 미국 네바다 발레단에 수출돼 로열티를 받는 쾌거를 이뤘다. 이후 ‘Inner Moves’ ‘12를 위한 변주’ 등을 연달아 수출했다.

이들 부부가 또 새 작품을 내놨다. 8월 28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개막하는 ‘지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순결한 지젤이 창녀로 전락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벌써부터 화제다. 고전 속 지젤이 사랑 때문에 죽고 유령이 된다면 이번 지젤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여인이다.

“지젤은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사실 이복남매였죠. 미혼모가 된 지젤은 유곽으로 가게 됩니다. 궁지에 몰린 여인이 결국 갈 곳이 어디겠어요? 하지만 비참한 현실에서도 모두를 용서하는 지젤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예쁜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니거든요.”(제임스 전)

고전을 재해석하는 일은 유럽에서는 흔히 있는 일. 제임스 전은 “외부 상황이 어렵다 해도 꼭 도전해 보고 싶었다”며 “유에서 또 다른 유를 만들어 내는 재미가 있다”고 털어놓는다. 고전발레 속 지젤의 흰 치마는 속이 비치는 미니스커트로, 우아한 몸동작은 근육을 드러내는 힘찬 몸짓으로 바뀐다.

“작품 사이사이에 현대 음악도 편집해 넣었어요. 앞으로 10년간은 계속 다듬어야겠죠. 여러분이 얼마나 사랑해 주실지 궁금합니다.”(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는 10월 3일에는 미국 공연에도 나선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동포들을 위해 벌이는 ‘추석맞이 퓨전발레 축제’다. 전통한복 차림으로 혼례식을 하는 퍼포먼스도 구성해 놓았다. 이어 10월 30, 31일 과천시민회관에서는 모던발레 프로젝트 ‘격정’을 무대에 올린다.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를 제임스 전 스타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 부부의 ‘파드 되(2인무)’는 그렇게 그칠 줄 모른다.

※‘she, 지젤’=8월 28~3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VIP석 7만원, R석 5만원, S석 2만원, 문의 02-3442-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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