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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저주’ 우리에겐 없다 M&A로 ‘계단식 성장’ 계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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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24면

박용만 두산 회장이 서울 을지로6가 두산타워빌딩 집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다섯 평 남짓한 그의 방엔 책상 외에 책장과 4인용 원탁 테이블이 있을 뿐이었다. 원래 집무실이 있던 33층이 지난달 공사에 들어가 임시로 쓰는 중이라지만 대기업 회장 집무실치곤 너무 소박해 보였다.

“오늘은 뉴욕에서 출발해 노스다코타에 가서 회의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미팅. 하루가 ‘완전 만땅’. 새벽부터 삽질로 힘찬 첫걸음! 으라차차차!”
지난 13일 박용만(54) ㈜두산 회장이 사회적 네트워킹 서비스(SNS)인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요즘 박 회장은 트위터에 푹 빠져 있다. ‘부인마마’ ‘폭탄 제조 머슴’ ‘당빠(당연하다)’ 같은 거침없는 표현에 ‘당근 근엄’할 것이란 선입견이 싹 달아난다. 18일 오전 서울 을지로6가에 있는 두산타워 32층 집무실에서 중앙SUNDAY와 인터뷰할 때도 그는 시종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이틀 전 뉴욕에서 돌아와 아직 낮밤이 바뀌지 않았다”고 인사를 했지만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위기 경영을 논할 때는 “감상적인 가치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두산은 건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CEO가 꼽은 CEO, 위기 경영의 지혜를 듣는다 ④ 박용만 ㈜두산 회장

글로벌 인재 영입 위해 美 출장 다녀와
-요즘 ‘트위터 하는 회장님’으로 네티즌 사이에 화제다.
“젊은 친구의 소개로 3주 전쯤에 시작했다. 잭 웰치 전 GE 회장도 한다고 해서 처음엔 트렌드를 따라간다는 뜻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직접 신변잡기를 쓰게 됐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도 또 다른 소통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에서다. 짬 나는 대로 아이폰을 들고 열심히 트위팅한다. 덕분에 쉬는 시간이 사라졌다(웃음).”

-뉴욕에는 어떤 일로 다녀왔나.
“글로벌 임원을 영입하기 위해 면접을 하고 왔다. (글로벌 경제위기 와중인) 지금이 좋은 사람을 뽑을 기회다. 뽑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경기 곡선이 반등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흡족한 후보를 찾았나.
“찰스 홀리 인사총괄 사장(CHRO)과 함께 출장을 가 세 명을 인터뷰했다. 이제 한 번 만났을 뿐이어서 아직 모르겠다. 5~6차례는 면접을 해 봐야 안다. 글로벌 인력을 선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짧아야 3개월, 길면 1년 넘게 걸릴 수도 있다. 홀리 사장만 해도 5개월 정도 걸렸다. 보상 등 영입 조건과 비전·철학이 서로 맞아야 한다.”

-외국인 인재 영입에 공을 들이는 것 같다.
“두산 매출의 65%가 해외에서 발생하고, 근무 인력 중 45%가 외국인이다. 의도적으로 외국인 임원을 채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임직원이) 없으면 안 되는 시대라서 그렇다.”

-지난 6월 특수목적회사(SPC)를 만들어 삼화왕관·두산DST·SRS코리아·한국우주항공(KAI) 등을 매각했다. 이를 통해 7800억원대의 유동성을 확보했는데,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나.
“1995년부터 지금까지 15년째 인수합병(M&A)을 해 왔다. 그동안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더라. 나중엔 다소 낯설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까지 수용하게 된다. 이번 역시 과거 딜(거래)을 참고해 현 상황에 맞게 발상을 바꾼 것이다.”

-2007년 인수한 밥캣의 실적 부진으로 한때 유동성 위기설이 돌았는데.
“애초부터 전혀 잘못 본 것이다. M&A와 관련해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두산이 단골로 거론됐다. 그러나 지금이니까 말하는데 우리는 다른 기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밥캣의 실적이 예상보다 부진했고 이에 따라 금융권 대출 계약 조건을 맞추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밥캣이라는 ‘한 계열사’의 특수하고도 일시적인 상황이었다. 이를 두산 전체의 위기로 해석한 것은 과장됐다.”

-왜 적극적으로 반론하지 않았나.
“글로벌 경제 전체가 어려워 변명하고 해명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여겼을 뿐이다.”
박 회장은 “그럼에도 두산이 (삼화왕관·두산DST 등을 매각하는) 구조조정을 한 것은 향후 경기 회복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차원이었다”며 “현재 두산은 3조원에 가까운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밥캣이 그룹의 발목을 잡은 것은 사실 아닌가.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내심 걱정이 많았을 것 같은데.
“밥캣 인수로 두산은 건설장비 시장에서 세계 7위로 뛰어올랐다. 북미·유럽 등 중국 이외의 글로벌 시장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 건설장비 산업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력의 차이를 좁힐 수 없다. 경쟁사를 따라잡고 글로벌 인프라스트럭처 지원 비즈니스(ISB)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밥캣 인수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만 밥캣의 주력 시장인 미국·유럽 지역의 경기 침체가 심해 실적이 부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1년간 보다 큰 관심은 밥캣의 본질 가치가 훼손되는지 여부였는데, 오히려 밥캣의 시장점유율은 높아졌다.”

-소비재 사업을 대폭 정리하고 중공업 회사로 변신했다.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의 결과다. 95년 위기가 닥쳤다. 창업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론 전혀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엔 구조조정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는데 계열사를 매각하니 밖에서는 ‘얼마나 어려우면’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회사가 망하는 줄 알고 금융권의 오해도 많이 받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성장하는 과정에서 M&A라는 계단식 성장 기법을 찾았다.”

95년 당시 두산은 출혈 경쟁 속 증설 투자로 유동성이 최악이었다. 그해 그룹 매출은 3조원인데, 적자가 9000억원이 넘었다. 결국 박용곤 당시 회장 등 오너 일가의 결단으로 신속한 구조조정에 나서게 된다. 경영권이 없는 3M·코닥·네슬레 등의 합작사 지분 매각을 시작으로 체질 강화에 나섰다.

-최근 M&A를 했다가 어려워지는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대개는 기업의 미래 가치 산정에 실패해서 그렇다. 가치 산정 과정에 감상적 요소가 개입하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승부욕이 앞서면 가치 이상의 금액을 적어내게 된다. 또 인수 뒤 기업의 가치 증대에 실패하거나 피인수 기업의 기존 가치를 다른 곳에 전용함으로써 지불 가격에 해당하는 기업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비싼 값을 지불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밥캣의 경우는 어떤가.
“밥캣의 주력 시장이 예측 불가능한 요인에 의해 위축된 데 따른 일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두산이 써낸 가격이나 인수 뒤 경영 전략에는 지금도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다.”

-수십 차례 M&A에서 얻은 원칙과 교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언론은 M&A 얘기가 나올 때마다 ‘아직도 배가 고프다’ ‘최후의 승자’ ‘소화불량’ 같은 수사(修辭)를 쓰는데 M&A는 먹고 먹히는 전쟁이 아니다. 총칼을 들이대고 강탈하지 않는 한 말이다. 한쪽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M&A는 성사되지 않는다. 서로 동일한 가치에 동의해야 한다. 이런 사고가 바탕이 돼야 서로 윈윈 할 수 있다. 두산의 M&A는 영토 확장이나 단순한 성장 욕구의 충족 과정이 아니다. 두산의 M&A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제품·기술·시장·고객 등 경영자원을 보유한 회사를 공정한 가격을 내고 인수함으로써 경영의 효율을 올리는 과정이다. M&A 원칙은 크게 네 가지다. 우선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 규모보다 미래 가치가 커야 한다. 다음은 사업 구조 개선 및 새로운 가치 창출이 가능해야 한다. 또 원천기술 등 차별화 가치를 갖고 있어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우수 인재가 많아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영국 밥콕이나 밥캣 등의 인수도 이런 원칙 아래 이뤄졌다.”

박 회장은 “M&A에 공정가격은 없다”고 주장했다. “얼마에 샀느냐는 주관적인 것이다. 한국중공업을 인수할 때 주당 8350원을 써냈다. 당시 주가(3670원)에 비하면 엄청 비싼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주가가 18만원을 넘기도 했다. 인수한 뒤 추가 이익을 얼마나 낼 것인가, 이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인 것이다. 100원을 쓰든, 200원을 쓰든 그것은 ‘나’만이 가지는 가치다. 그래서 인수 이후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전략적 검토가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우리도 시행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시행착오를 겪었다.”

-어느 딜이 가장 기억에 남나.
“OB맥주 매각이다. 선대가 물려준 주력 회사라는 감상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상대가 조심스럽게 나온 데다 딜 자체가 워낙 복잡해 힘들었다.”

-보람 있었던 딜을 꼽는다면.
“한국중공업 인수다. 2000년까지 계속 매각만 해오다 다시 성장으로 돌아선 첫 번째 딜이었다. 인수 이후 기업 가치가 가장 크게 증대된 사례다.”

-인수 기업 리스트를 갖고 있나. 있다면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
“밥캣 인수를 염두에 뒀던 때는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하기 이전부터다. 글로벌 ISB 시장에서 꽤 알려진 브랜드를 조사했고, 밥캣도 그중 하나였다. 마침 2007년 M&A 시장에 밥캣이 매물로 나왔고 그간 검토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M&A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밥캣 사례에서 보듯 두산의 사업 포트폴리오에 맞고, 원천기술을 가진, 그러면서도 신규 시장 개척 등에 필요한 기업이라면 모두 대상이 될 수 있다.”

-세계적 경기 침체는 언제쯤 끝이 보일 것 같은가.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데는 공감대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끝이 언제냐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쉽지 않다. 거시경제학자는 아니지만 바닥 상황이 오래갈 것 같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매물이 많이 나온 요즘이 M&A 하는 데 좋은 기회 아닌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려면 가치 있는 기업을 사야 하는데 가치 있는 기업은 위기를 잘 견뎌내기 때문에 매물로 잘 안 나온다. 나와도 너무 비싸다. 하지만 경기가 바닥을 친 이후 횡보가 지속될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진출 못한 분야 무궁무진
-체코 발전설비 업체인 스코다파워 인수를 추진한다고 들었는데.
“딜이라는 것은 항상 상호 비밀 유지의 의무가 있다. 지금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지켜봐 달라.”

-두산은 앞으로도 인프라 지원 사업에 집중하나.
“아직도 ISB 분야에서 할 게 너무 많다. ISB 분야를 광의적으로 보면 수처리·신재생 에너지 등을 포함해 연간 세계 시장 규모가 8700조원이나 된다. 우리가 진출해 있는 분야만 따지면 2700조원 정도 된다. 능력이 없어서 못할 뿐이지 아직 할 게 무궁무진하다.”

-경제위기 돌파의 노하우를 제시한다면.
“CEO가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위기가 어떤 형태인가, 얼마나 깊은가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원가 절감 등을 추구해 기업 체질을 바꿔야 한다. 둘째, 경기 회복의 속도와 양상이 어떠할 것인가 주시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경기 회복에 따른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먼저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그 다음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안이한 기대나 막연한 예상, 감상적 고려를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두산이 위기 극복 과정에서 가장 잘했다고 여겨지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야 지극히 현실적이며 강력한 실행 방법이 나온다. 위기가 오면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사활을 걸고…’ 같은 감정적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즉각적인 대응이다.”

-두산만이 보유한 경쟁력 요인이 있다면.
“원칙을 지키는 환경 대응력이다.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도 장점이다. 이제 우리는 곁눈질하지 않는다. 감상적 가치와는 이별했다. 하다 못해 창고를 지으려고 해도 땅이 없다. 부실한 자산 운용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오는 2015년까지 매출 100조원, 영업이익 10조원을 달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매출이 23조원으로, 목표 달성이 멀어 보인다.
“현재 목표의 실체를 분명히 하는 쪽으로 재정의할 계획이다. 사실 매출 100조원은 ‘남’이 어떤지는 생각 않고 ‘나’만 고려한 숫자다. 2020년 포춘 200대 글로벌 기업 진입, 2030년 100대 기업 진입 같은 ‘상대적인 개념’의 목표로 재설정할 계획이다.”

-다음 인터뷰할 분을 추천해 달라.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을 추천한다. 삼성으로부터 독립한 뒤 주력 업종이 상당 부분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것으로 생각한다. 새로운 변신을 위해 현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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