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원점출발의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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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한햇동안 IMF체제를 겪으면서 우리는 사람과 시간이 경쟁력의 핵심자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개혁의 속도라 할 수 있는 시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병폐를 도려냄에 있어 그것이 수십년에 걸쳐 쌓인 것이라 하여 정도 이상으로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접근한다면 수술의 적기 (適期) 를 놓쳐 환자의 생명자체를 잃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난 1년동안 우리는 시간과의 경쟁을 잘 치러냈는가.

혹시 적절하지 못한 사람들, 축 늘어진 시간과 싸우면서 개혁과 회생의 시기를 많이 잃은 것은 아닌가.

98년 4월에 발표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IMD) 의 국가경쟁력 보고서는 IMF 한파로 가뜩이나 지쳐 있는 한국인에게 적잖은 실망을 안겨준 바 있다.

평가대상 46개국 중 한국은 35위였다.

95년 26위에서 계속 뒷걸음쳐 온 것이다.35위라는 것은 대만 (16위).말레이시아 (20위) 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24위).필리핀 (32위) 보다 못한 것이다.

더욱이 국제화 수준이라는 분야에서는 최하위였고 금융부문은 러시아 다음으로 처지면서 45위였다.

과학기술과 인적 자원 부문도 28위와 22위에 머물러 한국의 인적 자원이 우수하다는 국내외의 평가를 무색하게 했다.

'아시아의 네마리 용' 중 싱가포르와 홍콩은 각각 2, 3위를 고수하고 있고 대만도 전년의 27위에서 16위로 도약했다.

그 옆에서 한국은 끊임없이 추락해 한강의 기적을 한강의 모래성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추락의 원인은 한마디로 선진국과의 지식격차라는 것이 보고서의 평가다.

격차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가 살아 있는 지식으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을 때 우리는 상아탑에 갇힌 죽은 지식만을 보듬으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추격하는 유일한 길은 지식혁명시대의 흐름을 남들보다 먼저 소화해 지식강국.두뇌강국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서는 역시 처방하고 있다.

한마디로 겨우 IMF체제가 요구하는 것에 맞추는 수준을 넘어 총체적인 국가개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가 되고 있다.

이 중요한 과제의 해결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이 나라를 망친 구 (舊) 엘리트 리더십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이 나라의 정치를 망친 자들에게 정치개혁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는 사실상 물 건너간 정치권 사정이 잘 말해주고 있다.

경제청문회가 잘 보여주겠지만 이 나라의 경제를 위기에 빠뜨린 개혁대상자들이 다시 경제회복을 맡는다면 국가부도를 재촉하는 일이 될 것이다.

땀 흘리지 않고 부동산 투기나 은행돈으로 부 (富) 를 물쓰듯 하는 한국의 졸부들, 정경유착과 빚잔치로 부실한 공룡이 돼 버린 재벌들, 권력과 돈에 기생해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가려온 일부 언론계와 교육계…이런 기득권세력은 반성하며 뒷줄로 물러서는 용기를 보여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원점에 서 있다.

가치관을 세우는 일에서부터 우리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원점은 무척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가득 찰 수도 있는 곳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죄없는 아기로 태어나 원점에서부터 인간의 고통을 몸으로 느꼈다.

그리곤 십자가를 거쳐 부활하셨다.

인간은 예수의 원점인생을 보면서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함께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비록 고통을 비껴가는 길을 알지는 못하지만 고통을 거쳐가는 길은 알 수 있다" 고 말한다.

예수성탄.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그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인간탄생이며 동시에 인간완성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완성품으로 이 땅에 보낼 수도 있었으나 인간으로서의 탄생이라는 원점의 길을 택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 영원한 젊은 기운이 이 세계를 관통해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는 메시지다.

예수의 탄생이 이뤄진 그 거룩하고 행복한 밤에 동시에 영원히 지지 않을 태양이 떠오른 것이다.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 때에 지는 해의 감상과 눈치에만 연연하면 지는 해의 운명을 자초하게 된다.

한국사회는 해가 지는 위기에서 벗어나 해가 뜨는 원점에서부터 다시 일어서야 한다.

국민 각자가 원점에서부터 다시 일어설 때 우리는 위기를 빨리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기회의 원점에서 기쁨과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자.

안충석 사당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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