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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일본의 반성과 선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 해를 결산하는 잡다한 세미나나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개혁이 자주 화제로 등장한다.

그 개혁의 속도가 일본에 매우 자극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새로운 시스템이 잘만 정착되면 이웃나라에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 대한 그들의 관찰이 정밀한 것인지 피상적인 것인지 판단하긴 어려우나 발언의 밑바닥에 "도대체 일본은 뭐하고 있는 거냐" 는 힐난과 반성을 깔고 있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일본은 98년 내내 반성하다가 한 해를 보낸 셈이다.

첫번째 반성은 일본이 리더 역할을 못했다는 데 있다.

그들의 앞 마당으로 여겨왔던 아시아에서 외화.통화위기가 일어날줄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아시아 각국의 최고 통치자에서부터 그들의 일족 및 측근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경제의 흐름도 꿰뚫어보고 있다고 자신해 온 일본의 허점은 지나친 유착관계에서 빚어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고무라 마사히코 (高村正彦) 외상은 이번 주초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지도해 온 남미보다, 유럽이 지도해 온 아프리카보다, 일본이 지원하고 지도해 온 아시아가 훨씬 많이 성장했다" 는 말로 일본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미국의 견제를 피할 수 있는 '아시아적 가치' 를 토대로 독자적인 외교를 펼 기회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 채권국인 일본이 21세기의 아시아 구상을 짜기에 안성맞춤인 시기는 미국의 경기가 내리막 길을 걷는 때다.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총리의 통치 수완은 아무래도 그의 독특한 더듬수에 있는 것 같다.

곧 끝날 듯 했던 내각 수명이 길어졌고 안될 듯 하던 정책들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는 자민당 - 자유당 연립정부를 곧 발족시켜 정권의 기반을 다지고 당내 비주류 인사들을 주류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를 무능한 총리로 얕잡아 보았던 사람들의 코가 납작해졌다.

오부치 총리는 한때 적으로 몰았던 보수 정객 오자와 이치로 (小澤一郎) 자유당 당수와 손잡고 정치의 관료에 대한 리더십, 정치가의 국민에 대한 리더십을 주장하고 있다.

두번째는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엔화의 힘이 약화된 데 대한 반성이다.

유럽의 단일 통화 유로가 곧 출범하는 21세기의 실험은 일본에 위협적인 것이다.

세계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미국 - 유럽 - 일본의 삼각구도에서 볼 때 일본이 파워 게임을 벌일 수 있는 여지가 너무 좁다.

대장성이 엔화 거래가 자유로운 국제시장 육성을 게을리해 왔고 규제일변도의 정책을 고수해온 결과다.

일본은 엔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을 내놓았다가 이름을 바꿔 3백억달러에 이르는 미야자와 구상을 발표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외화준비금 가운데 일정비율 이상을 엔화로 보유할 수 있도록 단기금융 시장을 개선하고 세제상 지원 혜택도 마련하고 있다.

세번째는 안보체제에 관한 것이다.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방위체제를 대폭 개선.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론을 등에 업은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일본 역할론이 적극적 안보론으로 확대됨으로써 중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 주변 지역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할 때를 가정한 미.일방위협력 지침에 관한 법안을 빨리 처리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미국과 차제에 방위력을 강화하고 싶은 일본의 입장이 맞아떨어졌다.

야당 등의 반대와 주변 국가의 우려를 어떻게 무마시키느냐가 최대의 과제다.

최근 이라크 사태 이후에 일본의 보수 언론들은 미국이 핵 의혹을 일으키고 있는 북한을 침공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다거나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졌다는 내용의 단행본을 내놓았다.

이같은 위기의식은 한국의 '햇볕정책' 을 다분히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시기를 전후해 정찰위성 도입을 결정했고 거액의 방위예산이 투입되는 전역미사일 방위 (TMD) 구상에 참여한다는 방침도 곧 발표할 예정이다.

네번째는 일본 국민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는 데 대한 반성이다.

정치.경제.사회적 여건이 한국보다 훨씬 우월한 입장에 있는 일본인들이 한국인들보다 더 비관적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그게 일본인들의 천성이라고 체념하는 사람도 있지만 7년 이상 지속돼 온 버블경기 붕괴 현상과 각 분야의 지도자 부재 (不在) 현상이 보다 심각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2차대전때까지는 무력으로, 패전이후에는 경제력으로 아시아를 이끌어 온 일본이 21세기에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기개를 발휘해야 한다는 '일본 대망론' 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의 전환기 극복을 위한 여러가지 움직임은 일본의 문제이면서 한국 등 이웃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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