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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제6장 두 행상

"선배, 신출내기 한 놈 접수해 줘야 하겠습니다. 주문진 대선배도 저 녀석 고집을 꺾지 못한 것 같은데,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거칠게 다뤄서 내쫓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 같이 데리고 들어온 형식을 승희가 거처하는 방에다 떠밀어 넣고 건너온 태호의 말이었다. 태호도 볼따구니가 불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형식이도 술 마셨나?" "말도 마십시오. 처음엔 딱 한 잔 마시라하고 부어 주었는데, 내가 저 녀석의 깔딱수에 속절없이 넘어가고 말았어요. 저 녀석의 쓸개가 뒤집히라 하고 시종여일하게 욕설도 하고 빈정거리는 투로만 나갔거든요. 그런데 녀석이 끝까지 부아를 터뜨리지 않고 공손하게 대응을 하긴 하는데, 언제부턴가 소변을 본답시고 포장마차 밖으로 들락날락하더라구요. 쓸데없이 출입이 빈번한 게 어쩐지 수상쩍어서 가만히 들치고 보았더니, 글쎄 녀석이 포장마차 바깥에다 소주병을 몰래 숨겨 놓고 들락거리면서 마시고 있었지 뭡니까. 그렇게 마셨는데도 지금까지 끄떡도 없어요. 입에서 소주 냄새조차 안 나더라니깐요. " 바로 그때였다.

승희가 거처하는 방문이 느닷없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어진 사이에 마루를 건너 마당의 수돗가로 내닫는 경황없는 발짝 소리가 들려왔고, 연달아 왝하며 토악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식이었다.

승희가 뒤따라 나와서 형식의 등을 어지럽게 쳐 주며 태호를 겨냥하여 고시랑거리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었던 주인노파까지 달려나가 수습을 거드는 소란이 벌어졌다.

"형식이 성적이 좀 미진하다고 하더라도 전문대학을 갈 수 있지 않을까. 학자금은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거들면 어떨까. 형님도 간단하게 단념하진 않으실 텐데?" "나도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런데 저 녀석은 중학교때부터 공부라는 게 애시당초 죽기보다 싫었다는 거예요.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리고 고등학교 3년 동안 교과서조차 아예 없는 과목이 많았다고 실토하는 걸 보면 학교라는 철천지 원수와 3년을 동거한 거예요. 그거 한가지는 끈질긴 녀석 아닙니까?"

"그런데…, 포장마차 뒤에 소주병을 감춰두고 몰래 홀찌락거리고 있더란 말이지?" "그렇더라니깐요. " "행상꾼 소질 가진 녀석이네. 형님이 휘둘릴 만하군. " 사태는 점입가경이었다.

마당 수돗가의 어지러운 움직임들이 얼추 수습되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두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방문이 덜컥 열렸다.

당장 시선에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아닌 형식이었다.

엄장은 들썩하였지만, 창백한 얼굴에 못다 게워낸 침버캐를 입술 언저리에 매달고 있는 녀석은 문을 열자마자 마룻바닥에 넙죽 조아리며 반은 우는 소리로, 텔레비전 연속사극 같은데서 익히 들었던 대사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었다.

"한선생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지 않으시면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 안동으로 떠나올 때부터 이 한마디는 꼭 해야겠다고 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말이거나 아니면 주정이었다.

말투가 어찌나 비장했던지 수돗가에서부터 사뭇 뒤따라다니며 냉수사발을 들이대고 있던 승희까지 킥 웃고 말았다.

알고 보면, 형식이도 한 달이 채 못가서 열아홉 살이 되는 성년이었다.

그의 결심도 흰소리로만 치부할 수 없었고, 아들을 보내 두고 전화조차 없이 시치미를 잡아떼고 있는 변씨의 속내도 익히 헤아릴 만했다.

그것은 형식을 접수해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그 무언의 압력에 화답해야 할 사람은 한철규였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밀양에서 구입한 감상자가 가득 실린 4톤 트럭에 형식을 화주로 앉혀 보낸 것이었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 조바심을 하는 승희를 만류해서 형식 혼자 보내는 모험적인 일을 성공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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