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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북한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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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몇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부탄 영화 '컵'에는 월드컵에 대한 명쾌한 정의가 나온다. 히말라야 산맥에 자리잡은 불교 왕국 부탄의 한 절에서 도를 닦던 동자승들이 월드컵에 정신이 팔려 불공이고 경읽기고 팽개치자 큰스님이 "월드컵이 뭐기에?" 묻는 장면이다.

1974년에서야 외부 세계에 문을 연 나라니 이런 질문이 나올 법하다. 더구나 큰스님은 중국의 탄압을 피해 티베트에서 탈출한 망명객이었다. 축구에 푹 빠진 동자승을 이해하는 축구팬 스님은 답한다. "컵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공 전쟁입니다. "

'컵'은 98년 7월 프랑스월드컵을 배경으로 했지만 축구 영화라 할 수는 없다. 4년 뒤에나 또 볼 수 있기에 목숨 걸고 텔레비전을 빌리고 안테나를 세우는 소동 속에 라마교의 가르침이 스며들고 나라 잃은 민족의 서러움이 배어든다. 축구가 미치게 좋아도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 욕망을 이긴다. 스님들이 프랑스를 응원하는 마음 한구석에는 중국에 대고 티베트 독립을 외쳐주는 우방에 대한 고마움이 있다. 코카콜라 캔을 찌그러뜨린 공을 차고 월드컵 중계를 보면서 그들은 축구를 넘어 펼쳐지는 세계화 리그의 패권 다툼을 본다. 세계화 전쟁은 첩첩산중 외딴 곳도 비켜가지 않았다.

2006년 독일월드컵 최종예선을 앞두고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제3국 관중 없는 경기'를 통고받은 북한 축구팀에 대해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 북한은 3월 30일 평양에서 연 북한-이란전에서 지나친 관중 항의로 매끄럽지 못한 경기 진행을 한 뒤 중징계를 당했다. 2일 한국을 찾은 '축구 황제' 프란츠 베켄바우어 독일월드컵 조직위원장이 "북한 축구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며 "징계가 너무 과하다"고 한마디 했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도 맞장구를 쳤다. 제3국 개최를 목소리 높여 주장하고 로비를 벌여 온 일본이 정작 결정이 내려지자 '동아시아의 동료'를 들먹이며 북한 달래기에 나섰다니 '공 전쟁'이란 표현이 더 실감난다.

'그깟 컵이 뭐기에' 공 차넣기에 그토록 목을 매느냐고 말하기에는 월드컵이 인류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현장에서 민족이고 이념이고 뭐든 녹여버리는 축구의 힘을 본 우리로서는 북한 축구가 '공 전쟁'을 잘 이용했으면 싶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