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인동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3면

중국 인물화의 최고봉인 동진(東晋·317~419) 때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아버지 고열(顧悅)이 황제를 만나러 궁에 들어섰다. 황제는 고열의 흰머리를 보며 “어찌 그렇게 머리카락이 희어졌느냐”고 물었다.

재치가 뛰어난 고열은 “부들과 버들은 가을 기운이 닥치면 떨어지지만, 소나무와 잣나무는 서리를 맞고서도 더 푸른 법입니다(蒲柳之姿, 望秋而落, 松柏之質, 經霜彌茂)”고 대답한다. 자신을 부들과 버들, 황제를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발언이다.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음은 불문가지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의 꿋꿋함을 알겠구나(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는 말의 다른 버전인 셈이다. 추사 김정희가 이를 그림 ‘세한도’로 그려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말이다.

송백의 굳건함에 비견할 수 있는 식물이 인동초(忍冬草)다. 차가운 겨울을 이겨낸다는 풀이다. 황금색 꽃과 함께 하얀 꽃이 피어나 금은화(金銀花)라고도 불리는 인동초는 가녀린 모양새와는 달리 겨울의 눈보라에도 견딘다. 엄혹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살아난 인동초는 해독제 등의 귀한 약재로도 쓰인다.

18일 세상을 떠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별칭이 인동초다. 서슬이 퍼렇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아래에서 그 모진 압제를 뚫고 일어나 이 나라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김 전 대통령의 역정에 매우 어울리는 별칭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에도 새삼 눈길이 간다. 큰 ‘대(大)’와 가운데 ‘중(中)’. 『중용(中庸)』에 나오는 “군자는 처한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君子時中)”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매사에 게으름 없이 올곧은 방향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덕목일 게다. 그가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시종일관 보였느냐에 대한 평가는 먼 훗날 역사가들의 몫이다. 어쨌든 김 전 대통령은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인 정치적 행보를 보이다가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가 남긴 여러 숙제가 있다. 해묵은 지역감정에 묶여 곧잘 난장으로 치닫는 정치문화, 북한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이념적 편 가름 등이다. 그 골들이 깊어지면 ‘인간 김대중’에게 우리는 가혹한 역사적 짐을 더 지우게 된다. 그는 거친 들판에 자랐던 인동초다. 그 향기가 한국 역사에 길이 남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화해와 용서를 노래할 때다.

유광종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