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회사 조기허용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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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당정 (黨政) 이 8일 기존 입장을 뒤집고 재벌들에 지주회사를 내년부터 전격 허용해주겠다는 깜짝 선언을 했다.

5대재벌이 하루전 살을 깎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놓은 데 대한 '선물' 의 성격이 짙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러나 정작 재계는 특별히 반가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이다.

당초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았던 지주회사 허용법안이 까다로운 조건투성이라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지주회사 허용법안은 ^지주회사의 부채비율을 1백%로 제한하고^지주회사의 자회사에 대한 지분율을 50% 이상 확보하며^지주회사와 소속 자회사들의 채무보증을 완전해소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붙어 있다.

이에 따라 공정위가 외국기업과의 역차별 (현행 공정거래법은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해서만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 을 해소하고 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겠다며 지난 7월 지주회사 허용법안을 국회에 올릴 때도 재계는 "현실성을 무시한 생색내기" 라며 볼멘소리를 했던 형편이다.

원래 공정위는 지분확보를 통해 자회사를 지배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순수지주회사를 허용해줄 경우 재벌들이 적은 돈으로 문어발식 확장을 가속화한다며 줄기차게 반대해왔었다.

"채무보증이 완전해소되고 결합재무제표가 도입되는 2000년 4월 이후에나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겠다" 는 게 그동안의 공정위 공식 입장. 그러다 올해 3월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에서 대통령을 접견한 외국기업 대표들이 "지주회사가 허용되지 않아 대한 (對韓) 투자에 걸림돌이 많다" 는 불평을 털어놓은 것을 계기로 '조기 허용'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자의반 타의반 숨가쁘게 진행돼온 공정위의 지주회사 허용작업은 예기치 못했던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당정협의 과정에서 "재벌들이 구조조정에 성의도 보이지 않는 마당에 지주회사를 허용해선 안된다" 며 국민회의가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후 재계의 냉담한 반응 속에 공정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정치권의 눈치만 살피던 중 7일 발표된 정.재계 합의를 계기로 해묵은 숙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게된 것이다.

재계에선 이를 계기로 어차피 구조조정 촉진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지주회사를 허용해 주기로 한 이상 설립요건을 더욱 완화해 달라는 주장을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구조조정 방안이 확정됨에 따라 이미 상호지급보증.부채비율을 일정에 따라 착착 줄여갈 계획인데다 주력업종 중심으로 계열사를 절반으로 줄이는 마당에 지주회사를 통해 문어발식 확장을 한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지주회사와 자회사간에 연결납세제도를 도입, 법인세의 중복부담을 해소하고 ▶자회사 노사분규와 관련된 지주회사의 책임범위에 관한 노동법상 문제 등 관련 걸림돌들도 해결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당정이 이같은 요구들을 얼마나 받아 들여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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