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과대평가한 미국의 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서울과 워싱턴의 감 (感) 이 멀다.

워싱턴에서 보는 서울보다 서울에서 바라본 워싱턴은 더욱 멀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서울에 들러 나눈 대화들을 귀임하는 비행기 속에서 곱씹어 보며 해답 찾기에 나섰다.

그리고 미국을 보는 우리의 착시 (錯視) 증상이 원인이라는 잠정 결론에 도달했다.

경제난 극복에 해법을 찾아가곤 있다지만 모든 잘못을 내탓으로 돌리며 자존심에 흠집을 내자니 억울하고 미 금융가 큰손들에 책임을 떠넘기려는 충동이 작동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아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계심이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촉발했다고 믿고 싶은 편의 (便宜) 의식이 미국 음모론을 부추기면서 워싱턴은 우리로부터 한결 멀어졌다.

게다가 북한 다루기에 영 어설픈 미국을 지켜보는 우리 머리 속에 워싱턴은 점차 가볍게 느껴지고 있다.

4년 전 북.미 기본합의가 대북관계의 온갖 고민을 해결해 주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북한의 정략에 휘둘리는 미국을 보며 왠지 속았다는 느낌마저 받는 모양이다.

생색은 미국이 내고 부담은 한국이 떠안은 형국을 개탄하고 미국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까 우려하면서도 뾰족한 대안은 없는 우리의 한계에 무력감을 맛보기도 한다.

마음을 열지 않는 북한과 믿지 못할 미국의 모습이 얽히며 워싱턴은 또 멀어져간다.

아울러 빌 클린턴 대통령의 스캔들을 둘러싸고 목격했던 미국 사회의 병든 가치관과 잘나가는 미국 경제의 혼돈스러운 조합은 미국을 보는 우리 눈의 초점을 더욱 흐려놓았다.

미국의 힘에 대한 과대평가와 우리 저력에 대한 폄하가 엇갈리고, 각박한 현실의 무게에 눌려 내탓.네탓 따지려는 투지마저 상실한 무력증도 미국을 냉정하게 보는 데 장애가 된다.

그러나 워싱턴이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다분히 출구없는 자해 (自害) 의식 때문이라면 미국을 향한 착시증상의 대가는 결국 우리 자신이 지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챘으면 싶다.

길정우 워싱턴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