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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3000건 로드킬, 운전자 안전까지 위협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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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호 10면

1990년대 후반,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선 저녁 여섯 시쯤이면 이런 안내방송이 한동안 나왔다.
“강남경찰서 J반장님, 현관 앞에서 친구분이 찾고 있습니다.”
“J반장님, 안내실로 와주십시오.”

도로공사가 길에 호랑이 울음소리를 트는 까닭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자 백화점 측과 경찰이 J반장을 늘 백화점 안에 있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 방송 이후 백화점에서 소매치기가 확 줄었다고 한다. 사제갈주생중달(死諸葛走生仲達). ‘죽은 제갈공명의 산 사마중달 쫓기’식 작전이었다. 이런 작전이 과연 짐승에게도 통할까.

한국도로공사(도공) 무주지사는 최근 대전동물원의 협조를 얻어 호랑이 울음소리를 녹음해 갔다. 그 다음 덕유산을 관통하는 중부고속도로 대전~통영 구간 도로변 곳곳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산 쪽으로 호랑이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도공은 호랑이 배설물까지 수거해 덕유산 주변 도로변에 뿌렸다. 고라니가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으면 본능적으로 도망가는 습성을 노린 것이다.

도공의 이런 노력은 야생동물이 길 위에서 차에 받혀 죽는 이른바 ‘로드킬(road kill)’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한 것이다. 도공에 따르면 로드킬은 2001년만 해도 400여 건이었으나 2005년부터 매년 3000건 안팎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발생한 로드킬은 총 2286건. 더욱 심각한 문제는 로드킬로 인한 인명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인명까지 앗아가기도
지난 6월 26일 새벽 2시20분. 전북 정읍시 태인면 호남고속도로 상행선 140㎞ 지점에서 카렌스 승용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뒤집혔다. 1, 2차로 사이의 고라니 사체를 피하려다 벌어진 일이다. 뒤따라오던 에쿠스·프라이드 승용차도 전복된 앞차를 피하려다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 야간이라 사고를 발견하지 못한 1t 화물차는 카렌스 승용차를 추돌했다. 죽은 고라니 한 마리 때문에 카렌스 운전자 김모(32)씨를 포함해 열 한 사람이 중상을 입고 말았다.

프로축구 대전 시티즌 김호 감독은 고라니 때문에 며느리와 손자를 한꺼번에 잃었다. 며느리와 손자가 탄 승용차가 지난해 5월 7일 오후 8시쯤 경기도 가평군 청평댐 인근 도로를 지나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를 피하려다 북한강에 빠진 게 원인이었다.

지난해 6월 30일 새벽 3시쯤엔 유수동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고속도로에 갑자기 뛰어든 고라니를 피하려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교통사고 통계엔 포함 안 돼
‘로드킬’ 때문에 생기는 교통사고. 더 이상 생태 선진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로드킬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매년 고속도로 및 국도가 산악지대로 3000㎞ 안팎씩 연장되면서 야생동물들의 서식지가 훼손되거나 이동통로가 단절됐기 때문이다. 특히 산골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많아 사고를 더욱 부추긴다.

녹색연합 양흥모 생태도시국장은 “요즘 국내 도로는 산을 우회하지 않고 터널을 만들고 있어 거의 높낮이가 같은 ‘일직선’ 구조”라며 “산 중턱을 절개하고 훼손하면 로드킬 사고가 더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로드킬이 야생동물뿐 아니라 인명 피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로드킬 때문에 생기는 인명 피해에 대한 통계는 경찰·도공 어디서도 잡고 있지 않다.
취재팀 확인 결과 2008년 교통사고 통계 가운데 ‘동물 침입’으로 인한 사망 사고는 0건. 유수동 전 행정관이나 김호 감독 가족 사고는 아예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도공 관계자는 “현재 로드킬 교통사고 건의 상당수가 ‘동물 침입’ 대신 운전자의 ‘핸들 과대 조작’ ‘안전거리 미확보’ ‘전방 주시 태만’으로 분류되고 있다”며 “매년 2000~3000건씩 로드킬이 일어나고 있어 인명 피해도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현황을 파악하기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로드킬 사고는 운전자 책임
로드킬 교통사고 운전자들은 사고 이후 보상논의 때도 ‘억울한’ 측면이 많다. 야간에 짐승이 튀어나오거나 바닥에 동물 사체가 방치돼 있어 사고를 당하더라도 대부분 운전자 책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현재 길 위에서 죽은 짐승은 ‘노면 잡물’로 분류되고 있다. 만약 도공이 로드킬 신고를 받고도 동물 사체를 치우지 않았다면 도공이 책임을 지도록 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운전자가 핸들 과대 조작 등의 명목으로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찰청 고속도로순찰대 손춘원 경장은 “도로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야생동물을 보면 누구나 놀라기 때문에 사고는 불가항력적”이라면서도 “하지만 인과관계의 증명이 어려워 도공에서 100% 보상 받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2007년 국정감사에서 “현행 제조물 피해법에서 제조물로 인한 피해의 입증은 생산자가 지도록 규정돼 있지만, 로드킬에 대해서는 생산자가 아닌 피해자가 입증 책임을 지고 있다”며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서해안선 지날 때 특히 ‘조심’
교통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운전자 본인이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말한다. 경찰은 특히 고라니에 대해 ‘갑호 비상령’을 발동해 놓은 상태다. 실제 2008년 발생한 2286건의 로드킬 가운데 고라니가 절반 이상인 1557건에 이른다. 너구리(456건)·산토끼(158건) 로드킬도 적지 않지만 인명 피해를 부른 사고는 대부분 고라니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라니가 주로 활동하는 야간 시간대에 과속운전은 금물이라고 경찰은 당부하고 있다.

정읍경찰서 교통조사계 채수성 경사는 “로드킬 사고는 주로 야간에 많이 일어나므로 과속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며 “야간 운행 차량이 증가하고 있는 피서철에는 더욱 서행 운전해야 2차 사고 발생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고속도로 순찰대 손춘원 경장은 “운전자들은 보통 동물이 나오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핸들을 꺾기 마련인데, 동물이 튀어나와도 과도하게 핸들을 꺾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한 야생동물 출몰 지역을 지나면서 휴대전화를 하거나 옆 좌석에 앉은 사람과 잡담을 나누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도로공사가 2007년 9월부터 2008년 7월까지 14개 노선 고속도로의 구간별 로드킬 건수를 정밀조사한 결과 서해안선(166건)과 경부선(109건), 영동 고속도로(84건)에서 사고가 가장 많았다. 중부내륙선(68건), 중앙선·88선(각 58건), 대전~통영 고속도로(48건)도 안심할 수 없는 구간이었다.

지난해 7월부터 환경부가 로드킬 빈발 구간을 지날 때 실시하는 내비게이션 안내방송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고 교통경찰관들은 당부했다.

안내방송은 자동차가 로드킬 빈발 구간 100m 앞에 접근하면 내비게이션에 안내 심벌이 나타나면서 ‘전방에 야생동물 출현이 예상됩니다. 주의운전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만약 운전 중 불가피하게 로드킬 사고가 일어났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도공은 2차 사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차량을 사고 지점에 두지 말고 갓길로 이동시킬 것을 권하고 있다. 차량을 그대로 뒀다가 심야에 연쇄 추돌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그 다음 도공 콜센터(1588-2505)에 신고를 하되 본인의 위치는 노선 200m마다 위치한 중앙분리대 이정표를 참고하면 된다고 도공은 설명했다. 도공은 사고 차량을 가까운 인터체인지까지 무료로 견인해주고 있다. 죽거나 차에 치인 동물을 발견하면 즉각 신고해야 다른 사람이 사고 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 경우도 1588-2505로 전화하면 된다.

호랑이 눈 닮은 반사경 설치도
도공은 로드킬 자체를 감소시키기 위한 묘수 찾기에도 골몰하고 있다. 도공이 가장 기대를 거는 것은 ‘유도 울타리’다. 동물이 도로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기존의 수로 등으로 동물의 이동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의 울타리다. 2005년부터 도로변에 본격적으로 설치하기 시작했다. 유도울타리 설치 결과 2004년부터 급증하던 로드킬이 지난해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도공은 설명했다.

‘동물도로’ 건설도 주력사업 중 하나다. 야생동물이 고속도로로 뛰어들지 않고 자기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이다.

도공은 현재 로드킬이 빈발하는 46개 지역에 육교나 파이프처럼 생긴 동물 통로의 설치를 완료했고, 29곳에 추가로 설치 중이다. 멸종위기 동물 삵이나 천연기념물 하늘다람쥐, 멧돼지·오소리·너구리 등이 이런 통로를 지나다니는 모습이 CCTV에 잡히기도 했다.

동물원에서 녹음해 간 호랑이 울음소리는 고라니 퇴치에 성공적이었을까. 도공 정홍준 홍보실 대리는 “통계론 잡히진 않지만 효과를 체감했다”고 전했다. ‘호랑이 효과’를 본 도공은 요즘 호랑이 눈처럼 번쩍이는 ‘타이거 아이’라는 반사경도 고라니 출몰 지역에 배치해 놓고 있다. 다만 호랑이 배설물은 냄새 효과가 1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 데다 동물원의 비협조로 ‘물건’ 구하기가 쉽지 않아 활용을 잠정 중단한 상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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