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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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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하성란, 창작과비평사, 298쪽, 8000원

<본문 136~137쪽>

우리의 결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난 내가 결혼할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칼을 쥐거나 걸레를 빨아 비틀 때만 왼손잡이가 되었고 한달에 한번,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늘 시내의 한 미용실에 가 10년째 이발을 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아내가 계속 직장에 다니기를 바란다는 것도 알았다. 3년 정도 연애를 한 연인이라면 누구나 그 정도쯤은 알고 있을 거라고 친구들은 말한다. 하지만 난 그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연애가 지루해질 무렵 우리는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날 후식으로 나온 귤껍질을 까던 그가 말했다. 연애기간이 길어봐야 시간과 돈만 낭비될 뿐이야. 나는 배 조각에 포크를 찔러넣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그럼 결혼하지 뭐. 우리의 결혼은 그렇게 음식의 맨 마지막 코스인 후식처럼 결정되어버렸다. 아무러면 어떻겠는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결혼 발표를 했을 때 다들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그렇게 사귀고도 결혼하지 않을 작정이었니? 하지만 나는 뭔가 미심쩍었다. 우리는 한번도 다투지 않았고 식성 또한 비슷했다. 문제라면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느 날 내가 그에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동성동본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난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야. 아무튼 우리는 동성동본이 아니었고 결혼까지 별문제가 없는 듯했다.

약혼자가 자취를 하고 있는 집은 산기슭에 있었다. 전철역에서 내린 후에도 그의 집까지는 도보로 30분 정도 걸렸다. 눈이 오면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로 이쪽과 저쪽은 영 딴판이었는데 약혼자는 난방으로 연탄을 써야 하는 낡은 집에 살고 있었다. 겨울이면 눈이 얼어붙은 언덕이 온통 연탄재투성이였다. 하루종일 먼지가 날렸다. 아주 오래된 낡은 양옥집의 사랑방을 나는 좋아했다.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처마에 플라스틱 루핑을 덧대어놓았는데 여름이면 루핑에 떨어지는 과장된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약혼자는 그 동네의 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그날 저녁에도 케이크와 포도주 한병을 사들고 그 언덕길을 올라갔다. 결혼 전 마지막으로 맞는 약혼자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30도 각도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동안 내 종아리에는 알이 뱄다. 젊은 남자들의 웃음소리는 골목 어귀까지 들려왔다. 대문은 열려 있었고 대문 맞은편의 약혼자 방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툇마루 아래에 세 켤레의 구두가 흩어진 채 놓여 있었다. 약혼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듯한 그의 친구들이 세 면의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누워 있다가 낯선 방문객을 맞았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자들이었다. 조도 낮은 형광등 아래 그들의 얼굴은 고단해 보였다. 구겨지고 때묻은 와이셔츠가 그들의 바빴던 하루를 말해주고 있었다. 무심코 내 얼굴을 쳐다보던 한 남자의 얼굴이 두부가 엉기듯 경직되었다.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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