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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한국 스님, 프랑스 수도원서 놀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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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요즘 누구나 ‘열린 종교’를 말하고 관용의 가치를 언급하지만, 이 가치를 서구지성사의 차원에서 멋지게 자리매김해준 이는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다. ‘신념은 자유다’라는 관용의 가치를 다룬 그의 전설적인 책은 『에라스무스 평전』과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두 권이다. ‘불도저 종교개혁가’였던 루터·칼뱅과 달리 부드러운 인문주의자로 남았던 에라스무스와 카스텔리오를 각각 다뤘는데, 이중 『에라스무스 평전』은 가톨릭·개혁파의 양극단을 배제했던 에라스무스의 삶이 감동적이다.

묻지마 신념을 가진 다혈질 루터와는 딴판이던 에라스무스는 ‘맨손으로 물과 불을 섞는’ 고난도의 작업에 도전했다. 종교개혁 이후 끔찍한 증오의 폭풍 속에서 펼쳐진 위대한 노력이었는데, 그런 견제가 없었더라면 루터의 신념은 광기로 치달았다는 게 츠바이크의 지적이다. 칼뱅 역시 신정(神政)정치를 실현했던 강철권력이었다. 그러나 그의 라이벌 카스텔리오는 달랐다. “누구도 신념을 강요할 수 없다”며 전체주의 폭력이 갖는 위험성을 견제했다.

때문에 지금 유럽의 종교적 평화는 순전히 그들 덕인데, 향적 스님의 신간 『프랑스 수도원의 고행』의 갈피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반가웠다. 책은 꼭 20년 전 한국 조계종의 향적 스님이 프랑스 가톨릭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1년 간 수도하는 과정을 담았는데, 가히 놀라웠다. 수도원 내의 한 인쇄소에 갔더니 그곳 책임자 신부의 방에는 관음보살상 사진이 붙어 있었다. 당시 한국의 풍토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 그곳 신부·수사들은 매주 월요일 스터디그룹에서 『법화경』 등을 열심히 공부했다.

“관음과 성모 마리아는 자비와 사랑의 화신인데, 불교에서는 관음으로 나타나고,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로 화현했다고 그들은 말했다. 수도원에 머물기 전 나는 가톨릭은 유일신교라서 타 종교에 배타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게 깨졌다.”(51쪽 요약) 저자의 말대로 불교 수행자를 받아준 것 자체가 관용의 미덕에서 가능했다는 게 중요하다. 종교개혁 시기 에라스무스·카스텔리오가 뿌렸던 위대한 씨앗이 꽃 피웠다는 게 내 생각인데, 관용의 미덕은 ‘다종교의 나라’ 한국 땅에도 이미 뿌리를 내렸다.

상대 종교의 경축일에 메시지를 보내는 게 그렇고,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는 조각가 최종태의 ‘성모 마리아 닮은 관음보살상’도 그걸 상징한다. 왼손에는 감로수 정병을 쥔 완벽한 관음이지만, 분위기는 영락없는 성모상이라서 절묘하다. 지난 20년 우리도 많이 변한 것이다. 그러면 신간 『프랑스 수도원의 고행』은 조금 늦게 나온 책일까? 아니다. 자칫 깨지기 쉬워 언제라도 새롭게 음미할 게 관용의 가치이니까. 실은 이 책은 종교나 관용의 가치를 넘어 누가 읽어도 마음 따뜻한 구도의 기록으로 읽힐 것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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