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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혹시라도 도움 될까” 취업 사교육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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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토요일엔 CFP 관련 학원에서 하루 종일 수업을 듣는다. 6개월 과정 학원비는 200만원. 교재는 따로 사야 하는 만큼 자격증 준비에만 매달 40만원이 든다. 토익학원 수강료까지 포함하면 취업준비에 드는 돈은 한 달에 50만원이 훌쩍 넘는다. 가을엔 면접·이력서 컨설팅도 받을 계획이다. 컨설팅은 한 번에 5만~10만원 정도가 든다. 연간 600만원 이상을 쓰는 꼴이다.

구직자들이 높은 ‘취업 사교육비’에 허덕이고 있다. 본지와 인크루트가 이달 대학생 1269명을 조사한 결과 한 사람당 한 해 평균 252만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원수강은 기본, 치아교정까지=건국대학교 4학년 이두한(25)씨의 일과는 오전 7시30분에 시작한다. 어학연수를 가려 했지만 1500만원이 넘게 드는 비용 때문에 취업준비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는 11월 CFP 자격시험을 볼 계획이다. 그는 오전 9시부터는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한다. 한 달 30시간 일하고 받는 돈은 20만원. 점심은 학생식당에서 2500원으로 때운 뒤 서울 강남역 부근 토익학원에 간다. 한 달에 25만원짜리다. 오후 4시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는 CFP시험 대비 동영상 강의를 듣는다.

지난달 150만원을 들여 수강권을 끊었다. 종합재무설계사(AFPK) 자격증 강의도 인터넷으로 공부한다. 40만원이 들었다. 강의료와 별도로 이들 자격증 응시료는 CFP가 20만원, AFPK가 5만원이다.

그는 “하숙비와 공과금을 제외하고도 취업준비에만 드는 비용이 한 달에 80만원은 족히 넘는다”며 “저학년 때에는 아르바이트라도 했지만 취업준비로 바쁜 지금은 부모님께 기댈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취업 사교육비로 고통받는 건 취업을 코앞에 둔 구직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기업 입사가 목표인 숙명여대 3학년 이승현(22)씨는 여름방학 동안 매일 서울 강남역 영어학원에서 6시간가량을 보낸다. 오전에는 한 달 20만원인 토익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영어 인터뷰에 대비해 어학연수반 수업(42만원)을 듣는다. 영어학원비로만 매달 62만원이 나간다. 권당 2만~3만원인 교재 값은 별도. 토익시험을 보는 달이면 응시료 3만9000원이 더 든다.

집이 서울이어서 따로 하숙비가 들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매달 30만원의 용돈을 받지만 교통비나 휴대전화비 등을 빼고 나면 그가 쓸 수 있는 돈은 20만원 남짓. 얇아진 지갑 형편에 점심값도 부담이다. 면접에 대비하기 위해 올 초 370만원을 들여 치아교정도 했다.

그는 “외국인 강사 수업 중에는 한 달에 80만원짜리도 있다”며 “금융자격증이나 고시 관련 강의에 드는 돈은 영어학원보다 훨씬 많다”고 말했다.

◆무작정 스펙 쌓기 악순환=기업들은 ▶출신대학 ▶외국어능력 ▶경력 등 다양한 요소를 감안해 서류전형 합격자를 뽑는다. 이 중 인·적성 검사와 면접시험을 통과한 일부만이 최종 합격자가 된다. 문제는 기업들이 어떤 전형요소를 얼마만큼 반영하는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기업들은 자기 회사의 신입사원들을 경쟁기업에 입사 지원하도록 해 합격 여부를 따져볼 정도다. 그 때문에 구직자들은 무작정 취업에 필요할 것 같은 자격증·토익 점수·경력 등 스펙을 쌓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박순애 소장은 “기업들은 실제 전형요소 중 일부만이라도 제대로 공개해 구직자들이 불필요한 스펙을 쌓는 일을 그만두도록 도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크루트 서미영 상무는 “구직자들은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무작정 스펙을 쌓으려는 경향이 있다”며 “천편일률적인 스펙보다는 구직자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진짜 능력을 쌓으라”고 권했다.

회사마다 신입사원 선발 때 눈여겨보는 요소가 따로 있어서 어떤 게 필요한 스펙인지 미리 파악해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대기업 인사담당자의 조언도 있다.

“돈 없는 구직자, 취업 경쟁에서 불리해질 우려”

취업에 도움이 되는지도 불확실한 자격증이 넘쳐나는 것도 문제다. 최근 인기인 한자능력시험의 경우 대한상공회의소가 주관하는 ‘상공회의소 시험’을 포함해 10종이 넘는다. 금융 관련 자격증도 이른바 ‘금융 3종(증권투자상담사·파생상품투자상담사·일임투자자산운용사)’을 필두로 20가지가 넘는다. 각종 응시료 역시 구직자들에게는 부담이다. 토익시험 응시료는 3만9000원이다. 스피킹 시험까지 보려면 6만6000원을 더 내야 한다. 박순애 소장은 “스펙 관리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드는 만큼 집안이 가난한 구직자들은 취업경쟁에서도 불리한 입장에 놓여 사회 전반의 불평등이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취업배치표까지 등장=구직자들은 조금이라도 취업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기 스펙에 비해 입사 난이도가 높은 기업은 아예 지원 자체를 포기하는 현상도 보인다. 일부 인터넷 취업 커뮤니티에는 입사 난이도에 따라 대학배치표를 본뜬 ‘취업배치표’까지 등장했다. 배치표는 ▶지원자격 ▶실제합격자점수 ▶필기시험, 인·적성 검사 유무 ▶봉사·자격증·경력사항 등 관련 영역별 난이도를 종합해 기업들을 1~3군으로 분류해놓고 있다. “학점·토익보다 면접이 중요하다” “인·적성 검사 성적이 중요하다”는 등의 회사별 특징도 담겨 있다.

기업들은 구직자들이 ‘일단 넣고 보자’는 식으로 업종·기업을 불문하고 지원해 허수 지원자를 가려내는 일에 골치를 앓았었다. 하지만 요즘 기업들은 엑셀 프로그램 등을 활용해 기준에 맞지 않는 지원자들을 걸러낸다. 그래서 구직자들은 서류심사 통과 자체가 어려워졌다고 느낀다. 실제로 본지와 인크루트가 구직자 827명에게 2008년 기준 매출 규모 상위 5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80.2%가 “가고 싶지만 떨어질 것 같아 지원하지 않는 회사가 있다”고 답했다.

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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