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시설 대응]수위 높이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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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 정부는 북한 지하시설이 핵과 관련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소식통들간엔 한국 정보당국이 북측 움직임을 파악, 미측에 전달했고 미 국방정보국 (DIA) 이 정밀분석 결과 근거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내용들을 조심스레 거론해왔다.

특히 94년 북.미 기본합의 주역이자 워싱턴 내 대북 강경파를 상대로 연착륙정책을 앞장서 개진해온 로버트 갈루치 전 미 핵대사가 지난 9월말 DIA측으로부터 상세 브리핑을 받고난 뒤 "핵의혹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됐다" 고 피력, 이같은 사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미 양국 모두 북한 핵활동이 북.미 기본합의에 따라 완전 동결된 것은 아니라는 잠정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면 거의 틀림없다.

문제는 앞으로 미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에 있다.

지난 12일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정책 재검토에 돌입한 미국으로선 북한의 미사일 개발 및 수출문제에 앞서 핵활동 현황 파악이 우선과제로 대두한 셈이다.

적대국과의 양자협상을 통해 미사일 확산을 억지한 전례가 없는 미국으로선 미사일 실험과 수출중단에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는 북한을 상대하는 것이 큰 부담이다.

하지만 북.미 기본합의가 대북정책의 근간이라고 누차 강조해 온 미 정부로선 북한의 비밀 핵활동에 대한 사실확인 작업없이 더이상 의회를 상대로 대북지원 예산을 요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미 정부의 고민은 워낙 민감한 사항이 일반에 공개된 마당이라 당장 분명한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현재로선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북한은 지하시설에 대한 접근단계에서부터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 요구대로 순순히 대가부터 지불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마음고생이 크다.

다만 북한이 건설 중인 지하시설이 핵활동에 이용되기까지는 상당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어 시간을 갖고 대안을 모색할 여지는 있는 셈이다.

미측이 이 문제로 법석을 떨어봤자 뾰족한 수가 없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로선 대북 강경론자들 사이에서도 거론되고 있는 포괄협상 (그랜드 바겐) 쪽으로 방향을 설정한 뒤 한국정부와 협의,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94년 북.미 기본합의 이전의 '과거' 핵활동에 대한 조속한 확인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겠지만 이는 북.미 합의를 미측이 먼저 깨는 모양새여서 미 정부로서도 쉽게 수용할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워싱턴 =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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