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는 지금…현지 한국인에 들어본다]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아슬아슬하게 미국의 공습을 피해간 이라크에는 아직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미국이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고 국제사회도 무기사찰을 거부했던 이라크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바그다드를 방문했던 현지 대사관 직원과 상사주재원, 창조사학회 (회장 張國遠) 회원들이 본 요즘 이라크 상황을 종합해 3회에 걸쳐 싣는다.

지난달 31일 저녁. 국영 '바그다드 TV' 는 숨가쁜 목소리로 긴급뉴스를 전했다.

"후세인 대통령 각하께서는 유엔특별사찰단 (UNSCOM) 과의 모든 협력관계를 중단키로 결정했습니다. "

유엔의 무기사찰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이 선언은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나 싶었습니다. "

당시 업무협의차 바그다드에 머무르고 있던 최종석 (崔鍾錫) 이라크 대리대사의 회고다.

崔대리대사는 요르단 암만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이라크대사 업무를 보고 있다.

다음날인 11월 1일, 미국은 곧바로 무력응징을 선언했고 이어 항공모함과 폭격기가 걸프해로 몰려들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날 바그다드 중심부에서는 연례행사인 만국박람회가 성대하게 문을 열었다.

아바이야 (남자 회교도가 입는 검은 망토) 와 쿠피아 (회교 여인들이 둘러쓰는 모자) 차림의 바그다드 시민들이 출품된 수천종의 제품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관람객 행렬은 박람회가 끝난 10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박람회에 참가했던 삼성전자 암만지사 최광호 과장은 "몰려든 바그다드 시민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미군이 폭격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없었다" 고 전했다.

박람회에 상품을 내놓은 한국 등 35개국 상사주재원들만 간밤의 뉴스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요르단 등에 부분적으로 허용하던 외부세계와의 전화통화를 1일부터 전면 금지했다.

이라크내 모든 신문과 방송에 대한 보도통제도 강화돼 미국의 페르시아만 병력증강소식은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방송은 후세인 대통령 찬가를 수시로 내보냈고 신문은 박람회 기사와 후세인의 치적, 그리고 회교 관련 소식 일색이었다.

이라크 국민이 외부세계 소식에 캄캄한 건 당연한 일. 10일, UNSCOM 1진이 이라크를 떠난지 사흘이 지난 후였다.

대통령궁이 내려다보이는 바그다드 최고의 메르디나 팔레스타인 호텔에는 외국상사원 10여명이 박람회를 끝내고 바그다드를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몇몇 외국인이 로비에서 호텔 종업원 나미 고리엘 토마스 (32)에게 혹시나 하고 현재상황을 물었다.

미국의 공습준비 소식을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미국이 경제제재도 모자라 우리를 공격한다니 그럴리가 있겠는가. "

그는 오히려 외국상사원들에게 외부에 무슨 일이 있는지 되물었다.

11일 바그다드에서 6백㎞쯤 떨어진 이라크와 요르단 국경. 미군 폭격기와 항공모함이 속속 페르시아만으로 집결하고 있는데도 국경수비대의 표정에서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다.

여느 때처럼 여행객들의 짐을 검색하고 여권을 확인하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17일 오후 요르단의 암만 시내에서는 20여대의 GMC지프에 짐을 가득 실은 UNSCOM이 유엔기를 달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향해 도로를 질주했다.

11일 현지에서 완전 철수한 지 6일만이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삼성전자 암만지사 박상경 (朴相卿) 과장은 "사찰단이 재입국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고 말했다.

최형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