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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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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광복절(光復節), 8·15는 올해로 64년째. 광복절은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 광복절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았던 것일까? 작가 강준식이 1945년 8월15일 일어났던 일을 정밀 추적했다.

■ 열리는 옥문

스페셜리포트 - 광복절 특집 - 해방 그날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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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사진)8월16일 오전 11시께, 여운형이 석방시킨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들이 독립문 전차 정거장에서 두 손을 들어 만세를 부르고 있다. (큰사진)일왕 히로히토.
8월16일 오전 10시, 예정대로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한 여운형은 그곳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사상범·경제범을 석방시켰다. 이날 서대문형무소를 위시해 서울 시내의 각 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난 출감자들은 모두 1만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미군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출감자들은 독립문 전차 종점 쪽으로 언덕길을 내려가 광화문통 쪽으로 나아갔다. 수감자들의 석방을 목격한 조선인들은 비로소 어제의 일왕 방송이 조선의 ‘해방’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용기백배한 그들은 석방자들의 시위 대열에 합류한 뒤 광화문→종로→남대문으로 행진하며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날의 광경을 서대문형무소에서부터 목격한 한 좌익인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치범을 석방하던 16일 날 아침 6시 반에 예정시간보다 두서너 시간 앞서 나는 서대문형무소 앞으로 갔다…. 예정시간이라던 9시가 지나고 10시가 가까워져갈 때 전차 내리는 데서 형무소 문 쪽으로 오르는 그 길에는 이럭저럭 모여든 사람들이 구경꾼들에 섞여 가득 찼다. 혁명동지를 맞이하러 오는 여운형 씨, 최용달 씨에게 군중들은 산발적이나마 박수를 보냈다. 차차 석방되어 나오는 듯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거리로 자동차가, 전차가, 또 트럭이 사람들을 넘치도록 싣고 달리고 또 달리고 만세를 부르고 외치고 뒤끓는 군중이 또 깃발이 저 종로로 남대문으로 차서 밀렸다.”(全厚, ‘혁명자의 私記-혁명에의 길’, <신천지> 1946년 3월호)

출옥자들을 보고 시민들이 합세해 도심에서 벌인 시위에 대해 총독부 관방총무과장 야마나 미키오(山名酒喜男)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8월16일, 경성부 안의 눈에 띄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다중민의 가두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다. 즉, 미국 깃발과 구 한국기를 함께 들고 ‘조선독립만세’ ‘연합군 환영’을 외치며 다중시위운동을 벌이고, 공기업의 승용차 및 트럭 등도 운전수가 조선인인 경우는 이 시위행렬운동에 참가하여 흡사 공기업 자체가 행렬과 행진에 참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드러내다.”(山名酒喜男 手記, <朝鮮總督府終政の記錄1>, 友邦協會, 도쿄, 1956)

변화는 가두시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매일신보> 문화부장이었던 조용만(趙容萬)은 “해방은 배불리 먹는 것부터 찾아오더군. 전시 중 거리에서 사라졌던 노점상들이 16일 오후부터 일제히 나타나 종로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어”라고 필자의 취재에 응했던 기억이 난다.

배급제의 궁핍시대를 겪은 서울 거리는 갑자기 먹는 노점상 천지가 되었고, 거리에는 쓰레기더미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이날부터 관공서나 일터로 출근하지 않는 장기무급휴가 조선인 가운데는 청소부들도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 해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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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옥문을 연 여운형의 이름 석 자는 경성 전체를 흔들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계동집으로 돌아온 뒤 측근들과 향후 문제를 의논하던 여운형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고 휘문중학교 교정에 모여든 5,000여 군중이 “여운형 선생은 나오시오!” 하고 외치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지축을 울리는 것 같은 군중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연단에 올라 그 특유의 사자후를 토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소이다! 어제 15일 아침에 원등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했던 것에 대하여 그 잘잘못을 조선에 다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상호간에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해 주기 바란다’고 했소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원등이에게 다섯 가지 요구를 내놓고 그 자리에서 무조건 승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민족 해방의 제 일보를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인 이상낙원을 건설해야 합니다….”

연설 도중 청중들 사이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오후 2시에 소련군이 경성역에 온다!”

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토막뿐이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의 진상을 조사한 미군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15일, 경성방송국의 JODK의 전파로 작동되어 적어도 그 방송을 듣는 사람들에게 소련 점령하의 자유 조선에서 송신된다고 믿어진 한 해적방송은 곧 임시정부가 경성에 수립될 것이며, 임시정부의 수뇌 3명이 다음날 열차 편으로 수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8월16일 조선 군중은 그 세 사람을 보려고 경성역에 나갔으나 경찰에 의해 쫓겨났으며 기대했던 관리 3명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Part1, Chapter3 ‘The Russian Scare’, , 1948)

위 기록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군중이 경성역으로 몰려간 것은 열차편으로 도착할 임시정부 수뇌 3명을 보기 위해서였고, 그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달된 것은 정체불명의 한 해적방송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미군자료가 기록한 해적방송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미스터리다.

소련 점령의 북한지역에서 송출되는 느낌을 주었다지만, 소련군이 청진을 점령한 것은 8월12일, 함흥·원산을 점령한 것은 8월21일, 그리고 평양을 점령한 것은 8월22일 이후다. 따라서 해적방송을 내보냈다는 8월15일 밤은 소련군이 청진을 점령한 지 불과 3일째 되던 날인데, 다른 지역을 점령하기에도 눈코 뜰 새 없었을 군대가 대민방송을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설령 방송했다 하더라도 이를 서울에서 듣게 하려면 송신소의 중계가 필요한데, 8월15일 시점에서 각처의 송신소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총독부다. 그렇다면 역으로 해적방송을 내보낸 주체는 소련군이 아니라 총독부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은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임시정부의 수뇌 3인과 관련하여 미군자료가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왕의 항복선언이 있은 직후 전단지와 포스터들이 나타났다. 그 중 하나인 작은 전단은 공산주의자나 소련 출처로부터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경축 조선독립! 동진(東震)공화국 선포! 대통령 김구(金九), 총리대신 이승만(李承晩), 외무대신 여운형,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참모총장 황운(黃雲)’”(Part1, Chapter3 ‘The Russian Scare’, , 1948)

전단지에 적힌 여운형과 황운은 서울에 있었으니 열차로 온다는 임시정부의 수뇌 3인이란 결국 김구·이승만·김일성을 가리키며, 해적방송이 언급한 임시정부란 ‘동진공화국’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해적방송과 전단지 사이에 어떤 연계성을 엿볼 수 있다. 8월16일 약 10만여 명에 달하는 서울 시민이 경성역으로 몰려간 것은 이들 동진공화국 수뇌 3명을 마중 나갔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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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6일 낮 12시께, 시민 5,000여 명의 요청으로 휘문중학교 교정에 나타난 몽양 여운형. 그러나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소련군이 경성에 입성한다는 유언비어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거니와 김구·이승만과 김일성은 이념적으로 같이 일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아마도 김일성의 이름 때문에 미군 자료는 이 명단의 출처가 소련이나 공산주의자일 것으로 보았으나,

이 무렵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느라 경황이 없었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또한 8월15에는 그런 작업을 벌일 만한 세력을 결집하고 있지 못했다.

이를테면 김일성은 아직 입국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박헌영은 은신해 있던 전라도 광주에서 아직 상경도 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정백은 여운형의 건준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별도의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전단지의 살포자는 해적방송의 경우와 같이 총독부 경찰 또는 헌병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해방 직후 영향력이 있던 <신천지>라는 잡지에 그같은 견해를 보인 신문기자들의 좌담회 기사가 실려 있어 해방 부분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봉구(서울신문) : 또 별안간 16일에는 소련군이 서울에 도착한다는 소문이 나서….

정광현(합동통신) : 정말! 그거 굉장했습니다. 그날 덕성여학교에서 열성자대회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 소식이 들어오자 ‘와’ 하고 역으로 몰려갔는데, 역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고, 대중은 지금 복계를 왔느니 철원에 왔느니 어디를 왔느니 하고 시시각각으로 온다는 소문이 돌았었습니다.

본지기자(신천지) : 그것이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닐 텐데요. 그 소문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정광현(합동통신) : 왜놈들의 모략이었다는데요.”(좌담회, ‘신문기자가 겪은 8·15’, <신천지> 1948년 8월호)
해방 직후의 신문기자들은 8월16일 군중들이 대거 서울역으로 몰려간 사건을 일본인의 모략으로 인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8월15일 여운형에게 치안권까지 이양한 일본인들은 왜 그런 모략을 벌인 것일까?


글 강준식 작가

<마지막 4편은 8월 14일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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