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금거북이 클럽의 선두주자 왕치산(王岐山)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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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지난달 27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전략 및 경제대화 단체사진이다. 중국 측 대표 왕치산(王岐山·61)이 미·중 대표단 정 가운데에서 당당하게 포즈를 취했다. 이 미중전략대화는 올 초 바이든-원자바오 총리급으로 격상된다는 설까지 흘러나왔지만 왕치산-클린턴으로 낙찰돼 향후 발전의 여지를 남겨뒀다. 4년 후 격상될 지 모르는 미·중 전략대화의 대표는 현재와 같은 조합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중국 정계의 간판스타이자 ‘소방대장’으로 불리는 왕치산의 과거를 살펴봤다.

◆보수파 부총리 야오이린(姚依林)의 딸과 결혼
아름다운 여성은 부자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재능있는 사내도 권력자 딸의 눈에 든다면 큰 출세의 길이 열린다.

고양이에겐 고양이의 길이 있고, 개에겐 개의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각각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재능을 보인다는 의미다. 중국공산당 고위층 사이엔 ‘금거북족(金龜族)’이라고 불리는 잘 나가는 그룹이 있다. 당(唐)대 고위관리의 공인된 옷 장식품이던 금거북에서 유래한 말이다. 금거북족은 특히 고관의 사위들의 대명사 ‘금거북사위(金龜壻)’로 많이 쓰인다. 특히 중국 외교부에는 금거북족이 많다. 외교부차관 왕광야(王光亞),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 왕이(王毅) 주임,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전외교부장 리자오싱(李肇星)이 모두 외교원로들의 사위로 금거북족에 속한다.

현재 금거북족 가운데 최고위직이자 최고 스타는 단연 왕치산 부총리다. 그는 전 국무원부총리 야오이린(姚依林)의 사위다. 장인과 사위가 모두 부총리가 된 것이다.

왕치산은 한족으로 1948년 7월생이다. 원적은 산시(山西)성 톈전(天鎭)현이지만 태어난 곳은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다.

1969년1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왕치산은 문혁기 여느 고교 졸업생들과 같이 농촌인 산시(陝西)성 옌안(延安)현 핑장(憑莊)공사로 하방되 농사를 지었다. 하방 2년 후인 1971년9월 그는 산시성박물관 직원으로 발탁됐다. 이는 당시로선 매우 드문 케이스였다. 고위 관리의 도움없이는 힘든 경우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야오이린의 큰 딸 야오밍산(姚明珊)도 69년 옌안 농촌에 하방돼, 베이징에서 하방된 지식청년 왕치산을 만나 결혼했다.

1973년9월 왕치산은 ‘노농병(勞農兵)’으로 추천되 서북대학 역사학부에 입학해 1976년9월까지 역사를 전공했다. 문혁기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이 많았지만 왕치산이 대학졸업증서를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왕치산은 대학 졸업 후에 산시성박물관으로 되돌아왔지만 1979년6월 베이징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역사연구소 실습연구원으로 전임됐다. 산시(陝西)에서 베이징으로 게다가 정예들만 모인다는 중국사회과학원으로 옮긴 것은 호적관리가 엄격하던 시절에 중요한 커넥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야오이린은 1979년7월 부총리로 승진했다.

◆역사에서 경제로 연구과제를 바꾸다
왕치산은 사회과학원 민국사연구실에서 근무했다. 이곳에는 『민국인물전』, 『중화민국대사기』, 『중화민국사』 편찬을 담당하는 세 개 소조가 있었다. 왕은 그 가운데 『민국인물전』조에 배속됐다.

주신추안(朱信泉) 민국사연구실 연구원의 회상에 따르면 왕치산은 “열정적이고 맡은 일에 적극적이며 매우 외향적인 청년”이었다. 게다가 역사학에 대해서도 왕치산은 비교적 착실한 기초지식을 구비하고 있었다. 『신해무창기의인물전』 등의 편집을 담당했으며 뛰어난 성취를 거뒀다.

왕치산은 현실의 국가경제와 인민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였다. 금융문제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는 개혁개방 초기로 모두가 개혁과 발전의 길을 어떻게 하면 크고 빠르게 갈 것인지 생각했다. 발전의 속도는 자금과 관계가 있고 예산과 관계됐다.” 그러나 주신추안은 왕치산이 이런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해 논문까지 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경제문제에 관안 왕치산의 두 편의 논문을 읽었다.”

지도를 담당한 주신추안은 왕치산이 경제논문을 썼어도 ‘본업을 소홀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젊은이는 발전의 기회를 보다 많이 가져야 한다. 왕치산은 경제문제에도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주신추안은 왕치산이 논문에서 주장한 구체적인 내용을 보다 잘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후에 이 경제논문들을 고위 지도자가 읽고 매우 높은 평가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그들 서너명이 매우 사이가 좋아 경제문제에 대해 열심히 논의했다. 언제나 함께 토론하고 논문을 썼다.”

주신추안은 왕치산이 경제면에서의 재능을 빠르게 보일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착실한 역사연구 기초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많은 문제연구 방법이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천안문 사건 후 국장으로 승진
2년 후 왕치산은 역사학연구 경험을 지닌 채 서재를 떠난다. 어지럽게 변화하는 경제활동의 제1선으로 나갔다. 그는 중국공산당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 자리잡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연구소를 출입했지만 왕치산이 어떤 방향으로 향해 가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1982년이래로 왕치산은 중공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 국무원농촌발전연구센터, 전국농촌개혁시험구판공실 등의 기구에서 지도직무를 담당했다. 1986년에는 38세에도 불구하고 정국급 간부로 승진했다.

주신추안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 사이에 왕치산이 정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중국공산당 고급간부자제 사이에는 세 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하나는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을 톱으로 하는 ‘덩파(鄧派)로 중국장애인연합회를 거점으로 쩡칭훙(曾慶紅), 위정성(兪正聲), 장더장(張德江), 왕루상(王魯湘)등이 여기에 속했다.

또 다른 파는 천윈(陳雲)의 장남 천위안(陳元)을 톱으로 하는 ‘천파(陳派)’로 주요 거점은 베이징의 장·청년경제연구회였다. 멤버는 마카이(馬凱, 현국무위원), 판위에(潘岳, 현국무원환경보호부부부장)와 왕치산 등이다.

다른 파는 자오즈양(趙紫陽)의 싱크탱크로 중공중앙정치개혁판공실 주임인 바오퉁(鮑彤)을 톱으로 하는 ‘자오파(趙派)였다.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소와 중앙정치체제개혁판공실의 몇명이 이에 속했다.

이 세 파 가운데 덩파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다음은 천파였다. 왕치산은 야오이린의 사위로 야오이린은 천윈경제의 후계자였다. 게다가 당시는 자오파가 시세를 타고 세력을 강화했지만 1989년 천안문사건으로 뿔뿔이 와해됐다.

천파의 후계자 야오이린은 1985년 중앙정치국위원으로 승진해 있었다. 38세의 사위를 국장으로 발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xiaokang@joongang.co.kr

※왕치산의 금융권 섭렵과 베이징 사스박멸 과정은 다음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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