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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통장을 또 만들어?” 짜증낸 그들 두 달 만에 ‘희플통’ 마니아 됐죠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는 우리 사회에도 한파를 몰고 왔다. 가계소득이 줄어들면서 저소득층으로 전락하는 가구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 서울시복지재단의 이성규 대표가 내놓은 혁신적 해답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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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복지재단이 야심차게 시작한 희망플러스통장제도. 그러나 시범사업을 시작하며 신청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성규 서울시복지재단 대표는 난감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없는 사람, 재산 모으기’ 원조인 미국도 놀라게 한, 돈 되는 복지통장 #이 사람 - 이성규 서울시복지재단 대표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뚱한 눈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등 반응이 냉랭했다. 재단 직원들과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지난 1년간의 시간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지, 이들 100명 대부분 중도에 포기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니 등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만에 신청자들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먼저 목소리를 높여 인사하고 환한 웃음을 짓는데, 처음과는 엄청 달라진 모습이더군요. 저축을 하면서 그들에게도 희망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창업할 수 있다는 희망,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서울시복지재단이 2007년 11월부터 시범실시한 희망플러스통장은 열심히 일하지만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제도다. 일정금액을 매달 3년간 저축하면 서울시와 민간 후원기관이 동일한 금액을 추가로 적립해주는 방식이다. 매월 20만 원을 저축하면 3년 후 1,440만 원의 적립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저소득층에 자산을 만들어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도인 셈. 이것은 서울시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시절부터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이 대표의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

“예전에는 가난한 계층이 그 수준이나마 연명할 수 있도록 그때그때 돈으로 수혈해주는 식이었죠. 죽어가는 말기암 환자에게 주사 몇 방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저소득층이 스스로 자산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줘 더 아래 빈곤층으로 떨어지기 전에 받쳐주자는 거죠. 어떻게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저소득층에게는 자활의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앵벌이’ 해가며 시작한 희망플러스통장

영국에서 유학을 마쳤을 무렵 이 대표는 미국의 마이클 쉬라든 교수가 발표한 저소득층의 자산 형성에 관한 논문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이후 대학 강단에서도 이 내용을 자주 인용했다. 쉬라든 교수의 이론은 미국에서 ‘IDA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는 2006년 서울시복지재단 대표로 임명된 후 사회복지 현장을 돌아다니면서도 ‘한국형 IDA’에 관한 고민을 계속했다. “처음 직원들에게 자산 형성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미 검토해 시에 건의했다 도로 접었다’고 대답하더군요. 직원들도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가능성 있는 계획이라는 것이었죠. 1년 동안 재검토하며 서울시 관계부처 공무원들과 협의를 계속했습니다.”

시작은 거의 밀어붙이다시피 하는 출발이었다. 이 대표는 “재단이 직접 끌어온 재원으로 시범사업을 시작해볼 테니 쓸 만하면 제대로 확립시키자”고 서울시에 제안했다. 그런데 돈을 대겠다던 기업이 슬그머니 발을 빼는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이 대표는 “그때부터 속된 말로 ‘앵벌이’를 시작했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기업 대표와 사장들을 만나러 다니며 도와달라고 사정했죠. 어떻게든 시범사업은 성사시켜야 하니까요. 한번은 어느 사장과 약속하고 2시간이 넘게 기다리는데 서러움까지 느껴지더군요.”

그렇게 어렵게 성사시킨 시범사업은 100가구를 선정해 1년8개월이 경과했다. 그동안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착실히 통장에 돈을 모으고 있어 98%의 유지율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IDA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1년이 지나면 20%가 빠져나가는 것에 비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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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규 대표(오른쪽)는 지난 5월 미국 워싱턴대를 방문해 마이클 쉬라든 워싱턴대 교수와 희망플러스통장 공동연구 협약을 맺었다.

가난의 대물림 “자산이 없기 때문”

오세훈 시장의 적극적 지원도 희망플러스통장의 시작과 확대에 큰 도움이 됐다. 시범사업을 시작하느라 이 대표가 쩔쩔매는 동안 오 시장도 이 사업을 주목했던 것. 원래 ‘희망통장’이었던 명칭도 서울시의 ‘희망드림프로젝트’에 전격 포함되면서 ‘희망플러스통장’으로 바뀌었다.

100명이던 시범사업단은 1차 1,000여 가구를 선정한 데 이어 5월에 5,000가구, 9월에 4,000여 가구를 모집해 연말까지 총 참여자를 2만 가구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일부 가구에 저축액을 2배로 만들어 주는 희망플러스통장은 형평성 측면에서 논란에 처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이 대표는 “재원을 민간에서 끌어와 그 부분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답했다.

“참가자가 20만 원을 저축하면 20만 원을 추가로 적립해주는데, 이 20만 원 중 10만 원은 정부출연기금, 나머지 10만 원은 기업을 비롯한 민간의 기부금으로 충당됩니다. 제도를 지원하는 기업에는 세금 등에서 혜택을 주는 방안을 마련해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죠.”

“장기적으로는 빈곤층 발생을 막아 사회적 비용을 절약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이 대표는 부연 설명을 한다.

“희망플러스통장에 참여할 1만 명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아마 5,000명은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가구는 4인 가족 기준 월 140만 원 가량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대부분 수급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녀 대에서도 똑같이 수급자생활을 하게 되는 대물림 현상이 발생하죠. 3년 동안 한 가구에 2,000만 원 가량을 지원하는 희망플러스통장제도가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손실이 훨씬 적습니다.”

희망플러스통장에 가입한 사람들은 그저 지원금만 받는 것이 아니다. 서울시복지재단이 제공하는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해 창업을 비롯한 자기계발교육을 받고 가정의 재무설계 도움도 요청할 수 있다.

“저소득층 가구들의 목표를 보면 대체로 창업·주거·교육 3가지입니다. 집을 장만하거나, 자기 가게를 갖거나, 남들처럼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 있다는 목표가 생기자 사람들이 달라지더군요. 저축이 힘들어져도 ‘투잡’을 가지면서까지 이 통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입 가구는 가족 단위로 교육받는데, 이 가족 구성원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여요. 교육에 대한 열기가 어느 사회보다 뜨거운 우리 실정을 감안해 ‘서울꿈나래통장’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금액과 적립기간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희망플러스통장과 동일한 내용이죠. 저소득가구 자녀의 교육자금을 돕는다는 목적입니다. ‘자산형성형 복지’가 가난의 대물림 고리를 끊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으로 자신합니다.”

5월에는 마이클 쉬라든 교수가 있는 워싱턴대 사회개발연구소와 희망플러스통장을 공동 연구하기로 협약했다. 서울시에서 자신의 이론이 실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쉬라든 교수가 먼저 연락을 취해왔던 것. 이론적 틀은 미국에서 따왔지만 결국 ‘서울시형 모델’을 본고장에 역수출하는 쾌거를 이룬 셈이다.

재단의 또 다른 주력사업의 이름은 ‘디딤돌’이다. 서울시복지재단 건물 1층에 들어서면 병원·약국·식당 등 각종 업소의 이름이 적힌 벽돌이 쌓여 커다란 하트 모양을 이룬 조형물이 있다. 바로 ‘서울디딤돌사업’을 형상화한 것.

“지역사회를 거점으로 복지를 활성화해 잃어버린 공동체를 부활시킨다는 것이 디딤돌사업의 핵심입니다. 원래 우리나라는 두레와 품앗이라는 공동체 전통의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 파괴되고 말았어요. ‘우리 집’은 있지만 ‘우리 마을’은 없어져버린 것이죠. 원래 ‘지역복지’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미국은 개인주의사회라고 아는데, 사실 들여다보면 마을공동체가 매우 강하거든요. 이웃 간의 소통이 단절된 우리 사회는 지역복지를 실천하기 전에 먼저 공동체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누구에게든 ‘자기 창조’의 기회는 줘야”

최근 일반시민 사이에도 봉사와 기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도 늘고 있다. 그러나 사용할 수 있는 복지예산은 한정돼 있게 마련. 이런 상황을 감안해 서울시복지재단이 기획한 사업이 바로 ‘디딤돌’이다. 지역의 미용실·문구점 등 각종 상점을 비롯해 병원과 법무법인까지, 기부를 원하는 업체는 어디든 참가할 수 있다.

자발적으로 디딤돌사업에 참여한 업체는 소년소녀가장·독거노인 등 저소득 소외계층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현재 등록업체는 965곳에 이용자는 1만5,000명을 돌파했다. 한 달에 두 명의 소년소녀가장의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실, 매주 다섯 명의 독거노인에게 자장면을 한 그릇씩 대접하는 등, 소소하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절실한 도움을 주는 이웃이 늘어나고 있다.

“지역의 소규모 업체가 지원하기 힘든 서비스는 광역자원으로 연계해 해결합니다. 고려대학교·우리은행· 법무법인 율촌·옐로우캡이사 등이 참여해 무료 이사, 무료 상담, 자원봉사 등을 제공합니다. 비싸서 엄두를 못 내던 임플란트도 일부 병원의 참여로 고령의 독거노인께 시술해 드릴 수 있게 됐죠. 서울시복지재단의 역할은 ‘연계’와 ‘모금’입니다.

기업과 단체의 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지역사회와 연계해 주는 거죠.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던 쪽도 사실 선뜻 믿고 복지관이나 봉사시설을 지원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서울시가 나서서 연결해주니 믿음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죠. 지역사회를 들여다보는 개념으로 접근하니 누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이 가능하고요.”

이 대표는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복지가 5년 안에 서울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장담한다. 저소득층의 자산형성과 공동체 지역복지, 전혀 새로운 개념의 이 두 가지 복지사업에 그는 지금 전력을 쏟고 있다. 파급효과는 서울시로만 그치지 않았다. 희망플러스통장과 비슷한 복지 서비스를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내놓기 시작했다.

이 현상을 두고 이 대표는 “결국 전국적으로 공적부조와 복지의 틀 자체를 바꾸는 뇌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재단의 대표로 있는 동안 저는 우리나라 공적부조의 개념 자체를 바꿔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희망플러스통장을 정착시키고 확대하고, 디딤돌사업이 전국으로 퍼져나가 마을공동체가 살아나게 되는 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은 자기 창조가 가능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자주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지원하면 받는 사람도 떳떳한 기분을 가질 수 없고, 때로는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부당하게 받는 경우도 생기죠. 단순히 돈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봅니다.”

>> 희망플러스통장은?

■대상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차상위복지급여대상자 등 소득과 자산이 일정 기준 이하인 사람 중 최근 1년간 10개월 이상의 근로소득이 있으며 현재 재직 중인 사람.

■방법 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월 5만 원/10만 원 중 택일, 그 외의 대상자는 월 10만 원/ 20만 원 중 택일해 3년간 매달 저축하면 동일한 금액을 정부와 민간이 만든 재원으로 적립해 준다.

■절차 1차 서류심사, 2차 서류심사와 면접심사를 통과하면 참가자가 최종 확정된다. 참가자는 약정 체결 후 통장을 개설하고 저축을 시작한다.

■일정 오는 9월께 약 4,000가구 추가 모집을 할 예정이다.

>> 꿈나래통장은?

■대상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차상위복지급여대상자 등 가구 소득과 자산이 일정기준 이하인 사람.

■방법 월 3만 원/5만 원/7만 원/10만 원 중 택일하여 적립개시일부터 5년/7년 중 선택, 정해진 기간에 매달 저축(단 10만 원 저축은 3자녀 이상 가능)하면 동일한 금액을 정부와 민간이 만든 재원으로 적립해 준다.

■절차 희망플러스통장과 동일

■일정 오는 9월께 약 4,000가구를 모집할 예정이다.
*단 희망플러스통장과 꿈나래통장 동시 가입은 할 수 없다.

>> 서울디딤돌사업은?

■개요 각 지역의 사회복지관, 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 등 복지시설들이 지역 내 크고 작은 상점의 기부를 받아 저소득층 주민과 연결해주는 방식.

■혜택 선정된 저소득층 주민은 지역 내 ‘아름다운 이웃’으로 참여한 업소에서 서비스와 물품을 받을 수 있다. 제공 업소는 ‘아름다운 이웃’ 현판이 붙으며 기부에 따른 소득공제를 받게 된다.

글 박미소 월간중앙 기자 [smile8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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