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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오싹한 추리소설 한 권, 움찔하는 한 밤 무더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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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추리소설을 일러 ‘자본주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산업사회의 온갖 치부를 소재로 하는데다, 자본주의 종주국인 영미권에서 싹이 트고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소설이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은 소설의 원형이란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를 반영하듯 현대 추리소설은 미묘한 인간 심리와 치열한 문제의식을 담아내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무더위를 잊는 데 도움이 될 ‘색깔 있는 추리소설’을 소개한다.

“그는 그녀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 절망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녀, 캐럴 로슨은 연쇄강간살인범의 피해자다. 성폭행을 당하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로슨은 그녀의 남편이다. 성폭행을 당한 이후 붕괴되어 가는 가정의 모습을 이처럼 간명하게, 그러나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여성 스릴러작가가 쓴 『서바이버 클럽』(리사 가드너 지음, 이영아 옮김, 시작, 543쪽, 1만4000원)에 나오는 구절이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의 주도(州都) 프로비던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연쇄강간 살인범의 손길에서 캐럴을 비롯한 세 여자가 살아 남았다. 이들은 모임을 만들어(제목은 여기서 나왔다) 경찰에 압력을 가하고 증언을 하는 등 ‘범인’체포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재판을 위해 법원에 도착한 범인은 살인청부업자의 손에 암살되고 그 저격범마저 폭사한다. 그 통에 세 피해여성이 의심을 받는다. 게다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또다른 범죄가 일어나자 무고한 사람을 지목했다는 비난 여론까지 이는데….

소설은 굵직한 세 가닥 흐름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세 명의 생존자가 보여주는 고통스런 삶이 그 하나다. 동생을 잃은 질리언 헤이스, 남편의 외도 의심과 강간 후유증으로 망가져가는 캐럴, 기억을 잃고 비밀스런 과거를 지닌 채 살아가는 메그 페사투로는 범죄의 악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에 아내를 지켜주지도, 이웃의 소아성애병자 살인마를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회한을 지닌 로언 그리핀 경사의 수사과정이 다른 큰 줄기를 이룬다. 이들이 가족 혹은 서로에게 위안을 받으며 저마다의 정신적 외상을 치유해 가는 모습을 보면 이 작품은 추리소설을 빌린 심리소설이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추리소설의 본산인 미국 작품 답게 DNA 검사마저 비웃는, 천재적 범죄자의 교묘한 범죄행각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막판 반전도 탁월해 추리애호가들이 즐길 만한 수작이다.

『편집된 죽음』(장 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문학동네, 215쪽, 9500원)은 두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하나는 추리소설의 변방인 스위스 출신 역사학자의 데뷔작이란 사실이다. 또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생애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는 점도 특이하다. 로맹 가리는 작가로 이름을 떨친 후에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도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해 공쿠르 상을 받았는가 하면, 자살로 삶을 마감한 괴짜 작가.

소설의 주인공은 프랑스 작가 니콜라 파브리와 영국 출판업자 에드워드 램. 두 사람은 어릴 적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친구였던 사이다. 잘 생기고 사교성이 뛰어난 파브리는 늘 주역이지만 열등감에 시달리는 램은 그의 그늘에 묻혀 지낸다. 2차 대전이 터지자 파브리는 조종사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외교관으로, 작가로 영광을 이어간다. 반면 사랑하던 베두인 족 소녀 야스미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램은 정보부의 위조전문가로 활동하다가 파브리의 작품을 손질해 영어판을 내는 출판업자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이집트를 무대로 한 파브리의 작품을 접한 램은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어 ‘복수’를 준비한다. 파브리가 공쿠르 상을 받는 날, 드디어 램은 준비했던 계획을 가동하고….

출판사에선 ‘스릴러’로, 작가 자신은 ‘서스펜스 심리소설’로 부른 이 작품은 프랑스의 손꼽히는 장르문학상을 받았다. 여느 추리물과는 달리 폭력은 없지만 열등감과 질투심에 시달리는 램의 내면 묘사가 뛰어난 범죄소설이다.

일본은 작품 수나 질에서 추리소설의 또다른 강국이다. 특히 사회문제를 파고드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는 일본 추리문학의 자랑이다. 그런 점에서 경찰조직 자체를 소재로 한 『은폐수사』(곤노 빈 지음, 이기웅 옮김, 시작, 335쪽, 1만1000원)는 별종이다. 경찰소설이라지만 범죄 또는 범죄 수사가 주가 아니고 명수사관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경찰청 총무과장으로 대언론 업무를 맡은 류자키 신야. 그는 도쿄대 출신으로 국가공무원 1종시험(한국의 행정고시 격) 을 통과한 엘리트 관료로,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그가 난제에 부딪친다.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피해자들이 묘하다. 소년 시절 휴악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법의 맹점으로 가벼운 처벌만 받고 사회에 복귀한 이들이다. 경찰이 개입한 ‘정의 구현’이란 냄새가 나는데 조직 상층부는 파장을 우려해 덮어두려고만 한다. 홍보맨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도쿄대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하던 아들이 헤로인이 든 담배를 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법대로 하자면 신고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그의 앞길은 엉망진창이 될 판이다. 원칙주의자 류자키는 고민에 빠진다.

경찰과 언론의 미묘한 관계, 고시파와 비고시파 간의 갈등이 섬세하게 그려진 부분은 많은 공무원· 회사원들의 공감을 자아낼 듯하다.

또 딸의 결혼과 아들의 진학을 둘러싼 의견대립을 보면 “일본이나 우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나 교묘한 두뇌싸움은 없지만 잔잔하면서도 다양한 얼굴을 지녀 추리 입문자에게 권할 만한 작품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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