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생사람 잡는 지식풍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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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 전역을 초토화시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자인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어째서 세계대전으로까지 확산됐는가.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 (One - Shot Theory) 만으로 전쟁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2차 세계대전 원인규명 연구서만 해도 수백권이 넘는다.

전쟁의 복합적 요인을 구조적으로 파악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은 학자가 해야 할 당연한 책무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성격 규정을 둘러싼 연구작업도 당시의 여러 복합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점에서 최장집 (崔章集) 고려대교수의 '한국전쟁의 한 해석' 은 한국전쟁 연구의 새 지평을 여는 중요 논문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보수적 냉전이론과 수정주의적 관점만으로는 전쟁의 역사적 실체파악이 어렵다고 본다.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선제공격은 이미 숱한 자료의 발굴과 연구 덕분에 의혹의 베일이 벗겨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분단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구조적 이해와 전쟁시기마다의 변화 내용을 살펴봐야 전쟁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북한 지도부가 오판했던 '민족해방전쟁 시기' , 미군 참전과 제한적 성격의 전쟁시기, 미국이 아시아 제패를 노리는 무제한적 전쟁확대 시기, 다시 원상회복으로 돌아가 휴전으로 종결되는 시기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를 요구하고 있다.

이 논문은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 종래의 냉전논리에 입각한 전쟁 연구를 복합적 구조로 새롭게 조명하자는 뜻에서의 '한 해석' 이다.

시론 (試論) 일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이 연구에 전폭적으로 동의는 하지 않지만 한국전쟁 연구의 안목과 시야의 폭을 넓히는 의미있는 연구작업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엊그제 월간조선 11월호의 신문광고를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崔章集교수의 충격적 한국전쟁觀. 6.25戰爭은 金日成의 역사적 결단. 南進은 민족해방전쟁, 北進은 재앙. 建準.人共.贊託을 긍정하고 제1건국을 비판하는 崔교수가 관계한 '제2건국운동' 은 어디로 가나?" 라는 광고문이 시커멓게 대서특필돼 있었다.

이럴 수가? 광고 문안대로라면 崔교수는 전쟁 자체를 북의 시각에서 보고 있고 이런 용공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 어떻게 새 정부의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제2건국운동을 주관하느냐는 매우 선동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잡지도 읽었고 문제된 그의 책을 주의깊게 살펴봤지만 흥분할 내용이 새롭게 없다.

崔교수가 이미 잘못 읽힌 부분에 대한 자세한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에 여기서 장황한 설명을 부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제목으로 뽑힌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 만 예로 들어보자.

"그 (김일성) 의 우세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그를 전쟁을 통한 총체적 승리라는 유혹에서 헤어날 수 없게 하였고, 결국 그는 전면전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무엇보다 김일성의 오판을 유도하였던 요소는 한반도의 국내 정치적 조건이라기보다는 국제 정치적 조건, 즉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던 냉전체제의 성격과 그곳에서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국의 힘이었다. "

이 문장에서 '김일성의 오판' 부분은 인용하지도 않은 채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 만 부각시켜 崔교수가 남침전쟁을 역사적 결단이라고 미화한 듯이 기술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긴장관계 속에서 사회는 발전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진보적 연구가 있어야 학문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조금만 진보적 사상을 가졌다면 용공분자로 모는 메카시적 수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잡지가 나오자마자 야당과 자민련이 성명서를 내고 崔교수의 위원장직 사퇴촉구와 보안법위반 구속 운운까지 하고 있는 행태다.

성명서를 내기 전 단 한번이라도 저자의 원전을 읽어보았다면 이런 소리는 못할 것이다.

"저 친구 평소부터 좀 수상했어, 알고보니 용공분자였구만. " 대충 이렇게 생사람 때려잡는 게 우리의 지적.정치적 풍토다.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도 그냥 불고 있다.

개혁이고 민주화고 큰 소리 칠 게 없다.

아직도 언론이 앞장서 레드 콤플렉스 바람을 불어제치면서 선동하고 정치인들이 멋모르고 맞장구를 치는 이런 한심한 세태 속에서 우리가 학문의 자유와 정치의 민주화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권영빈(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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