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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광화문 꽃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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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햇볕 쨍쨍한 오후 나절에 서울 한복판 광화문광장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아서일까. 출근길 버스 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좁게 느껴졌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뒤로 분수가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옷이 흠뻑 젖은 채 물줄기를 즐기고 있었다. 엄마들은 그런 아이를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광화문 쪽으로 걸으니 서울시가 ‘플라워 카펫’이라고 이름 붙인 꽃밭이 보였다. 길이 162m, 폭 17.5m. 생화를 22만4537송이나 심어놓았다고 한다. 전통 단청 문양을 응용해 디자인했다는데, 내가 문외한인 탓인지 경탄할 만한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모처럼 도심에 조성된 예쁜 꽃밭이기에 다정하게 봐주는 정도랄까. 그래서 일부에서 ‘오세훈 정원’이라며 삐딱하게 보는 것일까. 그래도 여유공간에 목말랐던 시민들은 곳곳의 포토 존에서 꽃처럼 환한 모습들을 서로 찰칵찰칵 찍어댔다.

광장 개방 사흘 만인 3일 이곳에서 첫 집회가 열렸다. 야당 소속 서울시의원·시민단체의 ‘광화문광장 조례안 폐지 촉구 기자회견’이었다. 불법집회라는 이유로 10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인근 서울광장에서 이슈가 됐던 ‘표현의 자유’의 불똥이 광화문광장으로 튄 것이다. 그러나 조례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광화문광장은 집회·시위 장소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광장에서 사람이 많이 들어설 수 있는 장소는 해치마당 입구에서 세종대왕상 예정지 사이의 얼마 안 되는 공간뿐이다. 여기에 수많은 인원이 몰릴 경우 결국 광화문 쪽 꽃밭도 훼손하게 되고, 세종로 큰길을 점거하는 사태로 치달을 게 뻔하다. 광장 바로 옆에 미국대사관이 있기 때문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중 ‘외교기관으로부터 100m 이내 장소’에 해당돼 집회 자체가 엄격히 제한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왜 ‘집회를 허(許)하라’는 불법집회가 열리는 것일까.

나는 과잉정치화된 우리 사회의 속성이 광화문광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건드려 보자. 조례가 개정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표현의 자유라는 이슈는 우리가 선점한다. 그런 생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 아닐까. 사실 불법이라 할지라도 정치 성향의 단체들이 광화문광장에서의 첫 집회 기록을 세운 것은 유감이다. 2일 아침 이곳에서는 택시가 승용차와 부딪친 뒤 플라워 카펫 안 해치상까지 돌진해 들어가는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아침 시간이라 시민이 다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광장과 차도 사이 턱이 낮아 특히 어린이들이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이 아주 크다. 그런데도 어린이 보호단체나 교통안전 단체가 항의시위를 벌였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덕분에 과잉정치화된 집회만 일반 국민에 부각되는 ‘과잉대표성’이 빚어지고 있는데도.

사실 서울시가 광장 개방을 앞두고 집회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나는 플라워 카펫 조성에는 광장에서의 시위를 막으려는 목적도 숨어있을 것으로 본다. 바이마르 공화국 혼란기에 독일 공산당은 시위 행진을 하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눈에 띄면 잔디밭을 우회해 갔다고 한다. 우리 질서의식이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멀쩡한 생화들을 마구 짓밟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이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광화문광장의 플라워 카펫은 우리의 질서의식, 나아가 민도(民度)의 시금석이 됐다. 누구나 경탄할 만큼 대단하지도 않고 오히려 인공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꽃밭이다. 광화문 꽃밭이 서울광장의 잔디처럼 때만 되면 무참하게 짓밟히는 신세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오래도록 시민의 눈길을 끌 것인가. 이게 다 우리 하기에 달렸다. 꽃밭 하나쯤이야 작은 문제라고?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큰 문제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