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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원 전비시서실장“박정희 시해는 우발적 범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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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규하 (崔圭夏) 전대통령은 10.26사건 직후 청와대에서 내가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위증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

1979년 10.26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때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주역 가운데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김계원 (金桂元.75)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19년 만에 '월간중앙 WIN' 과 인터뷰를 갖고 10.26사건과 그 이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월간중앙 WIN' 11월호 상보' 金씨는 사건 직후 청와대로 가장 먼저 달려온 崔당시 총리에게 "김재규 (金載圭) 와 차지철 (車智澈) 경호실장이 싸우는 과정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각하가 맞아 돌아가셨다고 보고했으나 崔씨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崔전대통령은 그후 합수부 참고인 진술을 통해 "김재규의 총에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보고를 김계원 실장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이던 崔전대통령의 이같은 진술은 김계원 전실장이 김재규 범행을 은폐하려 했다는 혐의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金씨의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崔전대통령이 왜 김재규의 범행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

이는 5.17 이후 신군부가 崔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데 이같은 '약점' 을 이용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金씨는 재판과정에서도 변호사를 통해 崔전대통령에게 "있는 그대로만 증언해 달라" 고 간곡히 요청했으나 "崔전대통령은 이를 묵살했다" 고 주장했다.

金씨는 "崔전대통령이 당시 신군부의 압력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증언을 했다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金씨는 10.26사건 이틀뒤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돼 김재규와의 공모혐의로 내란목적의 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죄 등으로 군법회의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계엄령하의 관할관 확인과정에서 무기로 감형된 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중 지난 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 뒤 88년 2월 특별사면 및 복권으로 형집행을 면제받았으며 공민권도 회복했다.

金씨는 "10.26사건은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의 우발적 단순살인사건인데도 신군부가 정권찬탈 (纂奪) 을 목적으로 확대해석해 나를 공범으로 몰아넣고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鄭昇和) 참모총장까지 연루시켜 사건을 조작했다" 며 "신군부는 권력을 잡기 위해 그 사건을 12.12 사태로까지 연결했다" 고 주장했다.

金씨는 "그날 만찬석상에서 김재규는 시국수습 방법을 놓고 朴대통령과 車경호실장 등으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질책을 듣자 분을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 고 말했다.

金씨는 그러나 김재규가 체포된 뒤 민주주의혁명을 위해 朴대통령을 살해했다는 주장을 편 것과 관련해 "김재규가 체포된 이틀 후부터 진술내용이 달라졌다고 들었다" 며 "기왕 죽게 된 것 사나이답게 죽자는 생각에서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한 결과 아니겠느냐" 고 해석했다.

金씨는 김재규가 ▶범행 후 가장 중요한 범행현장 보전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고 현장을 방치했으며▶鄭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로 가지 않고 사전계획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육군본부로 차를 돌린 것 등이 충동적 범행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라고 주장했다.

金씨는 또 대통령이 살해되는 현장에서 비서실장으로서 너무 소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느냐는 지적에 대해 "범행에 사용된 김재규의 첫번째 권총이 고장난 것은 내가 순간적으로 김재규를 밀었기 때문" 이라고 주장했다.

범행에 사용된 독일제 7연발 월터 PPK 권총은 무게가 5백70g에 불과한 호신용 소형권총으로 옆에서 살짝만 건드려도 탄피가 나가는 것이 막혀 작동이 안되는 약점이 있다고 金씨는 설명했다.

金씨는 또 "12.12사태가 문민정부에 의해 사실상의 쿠데타로 단죄된 이상 12.12사태의 원인이 된 10.26사건도 재평가돼야 마땅하다" 고 주장했다.

즉, 김재규가 김계원과 공모한 뒤 그의 수하들을 동원해 일으킨 정권찬탈을 위한 내란미수사건이 아니라 김재규에 의한 단순 살인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0.26사건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부는 9대 6의 다수결로 김재규 등의 상고를 기각했다.

김재규 등에게 씌워졌던 내란목적의 살인죄가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양병호 대법관 등 6명은 내란이 아닌 단순살인에 불과하다는 소수의견을 고집했고, 결국 이들은 신군부측이 사직을 강요해 법복을 벗었다.

金씨는 요즘 서울 강남에서 빌딩관리회사를 운영하는 아들의 사무실에 출퇴근하고 있다.

金씨는 사건 직후 신군부에 의해 자진헌납이라는 명목으로 전재산을 빼앗겼으나 현재의 빌딩을 짓게 된 땅은 친지 이름으로 사 둔 것이어서 헌납 대상에서 빠진 것이 오늘날 재기의 발판이 됐다고 한다.

서울강남구역삼동 뱅뱅사거리 요지에 있던 6백~7백평의 땅을 매개로 해 건설회사와 합작으로 오피스텔을 지어 분양하고 한 층만 소유하고 있다.

월간중앙 WIN 정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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