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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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미 제네바 협상의 미국 측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는 2004년 출간한 회고록(『북핵 위기의 전말』)에서 각종 전략과 옵션을 담다 보니 보고서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한다. 그럼에도 당시 백악관 주인이었던 빌 클린턴은 장문의 보고서를 밑줄까지 쳐가며 꼼꼼히 읽고, 코멘트와 질문을 달아 다시 보내왔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고 복잡했단 얘기다.

갈루치에 따르면 북핵 문제와 관련해 클린턴이 특별히 관심을 보인 것이 ‘루돌프 헤스 옵션’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혼자서 평화협상을 해보겠다고 영국으로 달려간 나치 독일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 선택지는 쥐를 몰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주고 몰아야 한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1차 북핵 위기의 핵심 쟁점 중 하나가 사용후 핵연료봉 처리 문제였고, NSC는 북한이 이를 보유하고 있는 한 계속적으로 문제를 야기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클린턴은 ‘루돌프 헤스 옵션’을 근거로 북한이 체면을 유지한 채 물러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NSC팀이 생각해낸 것이 영변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봉을 미국이 아닌 중국으로 빼돌리는 방안이었다. 미국은 북한이 이에 동의하면 유엔 안보리를 통한 대북 제재 착수를 중단할 수 있다고 북한에 구멍을 열어주기도 했다.

두 명의 미국 여기자 석방 교섭 임무를 띠고 평양으로 날아가면서 클린턴은 15년 전 상황을 회고했을 것이다. 위기의 해결사를 자임하고,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평양에 갔던 지미 카터를 떠올리며 돌고 도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했을 수도 있다. 그는 북·미 간 물밑 접촉으로 여기자 석방 문제의 가닥이 다 잡혀 있는 상태에서 평양에 갔다. 북핵 문제를 직접 다뤄본 경험이 있는 그는 자신의 방북이 갖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깜짝 방북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선택한 ‘루돌프 헤스 옵션’임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67세의 김 위원장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잇따라 미사일을 발사하고, 2차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스스로 벼랑 끝에 올라섰다. 미국은 유엔을 앞세워 전례 없이 강력한 제재로 북한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다. 그렇다고 압력에 밀려 ‘경애하는 지도자’가 슬그머니 벼랑 끝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북한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면 그 손을 잡고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 역할을 클린턴이 하도록 한다는 데 북·미 간에 이심전심의 합의가 이루어진 게 아닐까.

클린턴 방북의 진실은 좀 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날 것이다. 여기자 석방을 위한 인도적 차원의 일회성 이벤트였는지, 협상의 돌파구 마련을 위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는지 현재로선 속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15년 전 상황을 돌이켜볼 때 후자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일성과 만난 카터는 경수로와 핵동결을 맞바꾸는 중재안을 갖고 나왔고, 이 중재안은 곧 북·미 고위급 회담을 통해 구체화됐다.

중국이 곁에서 버티고 있고, 한국과 일본이 인접해 있는 지정학적 구도상 미국이 북한을 먼저 공격하긴 어렵다. 북한 체제가 스스로 붕괴하길 기다리거나 대화로 문제를 푸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는 점점 공고해질 뿐이다. 핵확산 의혹은 이미 미얀마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미국으로선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처지다.

클린턴의 방북으로 김 위원장은 체면을 유지하면서 벼랑 끝에서 내려올 수 있는 명분을 확보했다. 이미 대내적으로는 ‘대박’을 터뜨렸다. 뜻밖에 걸려든 두 명의 여기자를 인질 삼아 미국의 팔목을 비튼 그의 집요한 연출력은 징그러울 정도다. 그는 지금 자신의 건강과 후계 문제에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다잡는 효과를 만끽하고 있다.

6자회담이든 양자회담이든 형식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다. 워싱턴의 여름 휴가철이 끝나고 나면 중국의 중재하에 미국과 북한이 ‘포괄적 패키지’를 놓고 자리를 마주할지 모른다. 협상할 의사만 있다면 형식은 만들기 나름이다. 20년의 북핵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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