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빈대 잡자고 초가 태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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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치권은 40년전 그때도 그랬다.

58년 12월 자유당 국회가 경호권을 발동해 보안법을 통과시킨 일로 촉발된 보안법 파동으로 여야는 극한대결의 외길로 치달았다.

보릿고개 (春窮期) 와 미군감축 압력과 재일교포 북송 (北送) 같은 발등에 불은 정치권의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때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지난 4개월 동안 국회는 파당적인 일로 나라 일을 거의 버려두었고, 이 시간에도 국회가 움직이지 못하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내오고 있어. 국사가 위급하고 장황한 이 때에 이런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야. " 이승만은 40년 뒤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하고 학생들과 연대해 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미국은 대사의 본국소환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여야는 마주보고 달리는 두개의 열차 같이 양보와 후퇴를 몰랐다.

보다 못한 이승만은 민주당 대표 조병옥 (趙炳玉)에게 법무장관 홍진기 (洪璡基) 를 밀사로 보냈다.

어느 일식집에서 조병옥을 만난 홍진기는 여야대화로 정국의 위기를 풀어달라, 그리고 며칠안에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에서 점심을 같이 하면서 얘기하자는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조병옥은 국회기능이 마비된 마당에 여야간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전제하고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울 수야 없지 않은가" 라는 말로 즉석에서 이승만의 대화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민주당의 대여전략이 바뀌고 보안법 파동의 정치적 처리가 끝났다.

조병옥의 '초가삼간과 빈대' 론은 큰 정치의 귀감으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행동으로 따르는 정치인이 없다.

대여감정으로 살기등등한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이웅희 (李雄熙) 의원이 초가삼간론을 들어 여야대화의 결단을 촉구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여당쪽에서는 아예 초가삼간의 초자 (草字) 도 말하는 사람 없이 공격적인 발언만 무성했다.

청와대 오찬으로 물꼬가 트인 여야대화가 꼬인 정국을 푸는 마지막 기회다.

국민들의 인내는 한계에 왔다.

줄줄이 소환되고 구속되는 국회의원들, 떼지어 날아다니는 철새 정치인들, 쉴새없이 불어대는 무슨 바람 또 바람, 정부의 낙관과 달리 피부로는 더 어렵게만 느껴지는 경제, 국민의 시름에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인들. 거기에 나만이 옳다는 독선과 오만 및 위기불감증에 국민은 짜증만 난다.

국민회의 지도부는 검찰을 휘하에 두고 있는 걸로 착각하는 것 같다.

세풍이고 북풍이고간에 수사기관이 진상을 밝히기도 전에 야당지도자의 퇴출을 주장한다.

정치력은 흔적도 안보인다.

정치는 청와대에 헌상 (獻上) 했는가.

여당의 공세가 치열할수록 야당이 기댈 곳은 민의 (民意) 의 전당인 국회뿐인데 야당은 장외투쟁으로 전략 부재 (不在) 를 드러내고 있다.

40년전 보안법 파동 당시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유진산 (柳珍山) 은 당내 강경파의 견제로 여당과의 협상이 번번이 좌절되자 "비분강개에 죽기는 쉬워도 의로운 일에 나아감이 더 어렵다" 고 한탄했다.

오늘의 정치지도자들은 신념에 목숨바칠 생각이 없으면서 꼭 비분강개에 죽을 각오라도 돼 있는 사람들 같이 극한용어를 남발해 국민만 불안에 떨게 한다.

청와대 오찬은 큰 것을 위해 결연히 작은 것을 내던질 줄 알았던 조병옥의 대승적인 정치가 아쉬운 때에 성사됐다.

일단은 먹구름을 뚫고 햇님이 살짝 얼굴을 드러낸 모습이어서 그 후속에 대한 기대가 크다.

오찬은 여야 영수회담을 거쳐 정치복원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정치가 경제살리기를 밀어주면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다 태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허무주의와 정치적 냉소주의는 위험수위다.

직장 잃은 노숙자는 날로 늘고, 주부와 여학생이 윤락에 몸을 던지고, 애비가 보험금을 노려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는 세태에 정쟁은 국민에 대한 폭력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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