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통령 일본방문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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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파탄에 빠진 한국과 전후 최악의 경제혼미에 허덕이는 일본.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방일 (訪日) 을 둘러싼 양국의 환경은 평온하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양국의 심각한 위기상황은 오히려 새 한.일관계의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위기의 내용은 두가지다.

하나는 통화위기에서 촉발된 심각한 경기후퇴다.

세계적인 투기자본에 농락된 측면도 있지만 양국경제의 구조적인 결함은 이제 누구의 눈에도 확연히 드러난 상태다.

그것은 일본의 호송선단 방식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정부개입으로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는 반 (半) 계획경제적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왜곡된 시스템 아래서 급성장을 추구했고 지금은 똑같이 경제가 후퇴하고 있다.

쌍둥이처럼 닮은 양국 경제시스템은 엔 강세가 되면 한국이 일본을 추격하고 엔 약세가 되면 일본이 되받아치는 제로섬 게임을 전개해왔다.

하지만 아시아위기에서 출발한 세계 동시 디플레이션으로 양국간 상호조정은 불가피한 과제가 됐다.

결국 세계 1위와 2위인 양국 철강업체의 제휴로 대표되듯 수평적인 협력을 통해 군살을 빼고 효율성과 수익성을 중시하는 분업체제의 모색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가 강화되면 한국은 경제에서마저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노출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촉진하는 요인이 됐다.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대한 불만을 결집시켜 아시아의 환율안정을 노리는 일본으로서는 일본에 접근하는 한국이야말로 환영할 만한 동반자다.

한.일관계에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또하나는 북한 대포동미사일의 충격이다.

미사일은 일본 본토를 지나 태평양에 떨어져 일본 전체를 놀라게 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한국과의 협력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게 됐다.

역설적이지만 대포동 충격이 일본에 본격적인 한반도정책의 필요성을 통감시킨 것이다.

햇볕정책을 견지하는 한국정부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 의 존속을 위해 일본의 절도있는 관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경제와 안전보장에 걸쳐 한.일 양국의 접근을 재촉하는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이런 상황이 양국의 관계개선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과거사문제 해결이 매우 중요하며, 金대통령의 방일 목적도 그 확고한 그림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다.

물론 이로써 역사의 속박이 모두 풀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역사를 규명하는 초당파 의원모임이 생겨나고 한.일 양국의 역사에 관한 학자와 시민포럼이 많이 열리는 등 상호이해의 기운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도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다.

어쨌든 한.일 양국은 공동성명을 기초로 해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실시해나가 동북아시아에서 지역적 협력기구 창설의 선도역을 맡지 않으면 안된다.

방일에 거는 金대통령의 집념은 그 굳은 결의를 웅변하고 있다.

강상중(도쿄대 교수.在日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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