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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코드] 1. 올림픽 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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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 고대 올림픽 때마다 젊은이들이 최고의 기량으로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입장했던 스타디움 입구. 고대 올림픽은 반드시 한 장소에서만 열렸고, 올림픽이 열리던 성스러운 장소가 올림피아다. [올림피아=안성식 기자]

▶ 올림픽에 참가한 젊은이들이 결승점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는 모습. [타임라이프 북스]

[관련화보]

▶ 한눈에 보는 그리스 문화

올림픽-. 흔히 인류의 제전이라 일컫는다. 근대 올림픽 100년을 맞는 올해에는 오는 13일부터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올림픽 성화가 점화된다. 그리스는 인류 최초의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인류에게 올림픽만 남기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물론 문학과 철학, 역사학, 수학과 의학, 연극과 조각에서부터 스포츠의 페어플레이 정신까지 오늘날 인류가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이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를 모르고는 서양을 읽을 수 없다. 지구촌 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일상에도 그리스적 가치관은 깊숙이 배어있다. 인류 문명의 원류 중 하나인 고대 그리스로 전문가와 함께 떠나 보는 장기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올림피아의 8월 태양 아래 벌거벗은 젊은이들이 스타디움 입구인 둥근 아치 통로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아직 아침나절이지만 햇빛은 강렬하다. 올리브 기름을 발라 정성껏 가꾼 젊은이들의 피부는 아름답게 빛난다.

방금 젊은이들은 한줄로 늘어선 제우스 동상들 앞을 지나왔다. 올림픽에서 경기 규칙을 어긴 선수들에게서 거둔 돈으로 만든 이 동상들에는 규칙 위반 선수의 이름과 가문, 도시국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대를 이어 망신을 주고 페어플레이 정신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뜻에서다.

그리스 남서부 올림피아에서 열린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부터 로마시대인 기원후 393년까지 무려 1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주최국은 매회 바뀌지 않고 처음 올림픽을 제안했던 도시국가 엘리스가 계속 맡았다.

올림픽 준비는 적어도 1년 전부터 시작했다. 올림픽 참가 선수들이 10개월 전부터는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엘리스는 그리스 세계 곳곳으로 전령들을 보내 올림픽 개최를 알렸다. 전령들은 동-서로는 시리아에서 바르셀로나까지, 남-북으로는 북부 아프리카에서 흑해 연안까지 멀고 먼 길을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올림픽에 참가할 선수들은 이때부터 코치의 엄격한 감시 아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단순히 체육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젊은 선수들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취지에 따라 운동하는 사이에 틈틈이 읽기.쓰기 교육은 물론 음악 교육까지도 받았다.

선수들은 올림픽이 열리기 한 달 전 엘리스에 도착해 올림픽 심판들의 건전한 육체와 정신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쳤다. 그 과정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탈락의 쓴 잔을 마시고 관람석에서 구경해야 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는 수백에 이르렀다. 이들 도시국가의 12세 이상 시민이라면 누구나 올림픽 선수로 참가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국가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참가했다. 올림픽은 개인의 역량과 덕을 가리는 선의의 경쟁의 장이지 국가나 특정 집단의 우열을 가리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고대 올림픽 종목에는 축구나 이어달리기 같은 단체 경기가 없었다. 달리기와 레슬링.권투.원반던지기와 같은 개인 종목만 있었을 뿐이다.

여성들은 종교적 전통에 따라 고대 올림픽에 참가할 수도, 관람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토착신 데메테르 카미네를 모시는 여사제의 관람은 필수적이었다. 그녀가 올림픽을 참관해야만 올림픽 경기가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좌석은 지금도 스타디움 북쪽에 남아 있다.

특기할 점은 당시 선수들이 모두 벌거벗고 출전했다는 점이다. 남자들이 알몸으로 벌이는 스포츠 제전에 여자들의 관람이 금지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 벗었을까. 고대 올림픽은 제우스 신에게 바쳐진 스포츠 제전이었으므로 올림픽의 제1 관객은 제우스 자신이었다. 그래서 올림피아의 스타디움은 제우스 신전에 모셔져 있는 제우스 신상이 굽어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제우스신 앞에 선수들이 벌거벗은 몸매를 드러내는 것은 당연했다. 벌거벗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경건함의 표시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픽에서뿐 아니라 평소에 운동을 할 때도 옷을 벗었다. 체육을 뜻하는 그리스 말 '귐나스티케(gymnastike)'는 '벌거벗다'를 뜻하는 어간 '귐(gymn-)'에서 온 말이다. 운동을 하는 곳을 가리키는 '귐나시온(gymnasion)'도 '벌거벗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운동은 철학이나 정치적 토론, 경제 활동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래서 모든 도시국가에는 종교적 중심지인 아크로폴리스와 경제활동의 중심인 아고라, 교육과 오락의 장인 극장과 함께 시민 건강을 위한 귐나시온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고대 올림픽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대한으로 갈고 닦은 최고의 기량과 고도로 단련된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선수들이 불굴의 투지로 최선을 다해 정정당당하게 겨루는 모습을 보여 주어 제우스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고대 올림픽의 목적이었다.

제우스는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인간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우고, 가장 아름다운 몸과 영혼을 가진 자에게 승리의 영광을 주었다. 이런 선의의 경쟁에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었다. 승자는 제우스의 선택을 받은 '최고의 인간'이고 패자는 승자의 최고 기량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도와 준 동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올림픽 정신은 로마시대에 와서 폭군 네로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힌다. 자기 과시욕에 사로잡힌 네로는 자신이 참가할 수 있도록 올림픽 개최를 2년 늦추는가 하면 규정에도 없는 음악 경연을 신설해 우승한다.

또 전차 경기에서는 도중에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고만 없었다면 우승이 확실했다는 억지를 부려 이 경기에서도 우승한다. 네로가 죽은 뒤, 이 우승은 취소되었지만 올림픽 정신의 훼손은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고대 올림픽은 최고의 기량과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신을 기쁘게 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겸허하고 진지한 탐구의 과정이었다. 그러기에 승리자가 받는 보상은 고작 야생 올리브관 하나였을 뿐이다. 또 우승자는 조국에 영광을 안겨 주기는 했지만 국력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개인의 영광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 올림픽은 국가의 국력 과시의 장으로, 프로 선수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 네로의 욕심처럼 천박하고 역겹다. 오늘날 인류는 어떻게 수많은 '네로'들로부터 올림픽 정신을 구해낼 수 있을까.

올림피아=글 유재원 교수(외국어대), 사진 안성식 기자

◇유재원 교수=1950년 서울생.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후 그리스 아테네국립대에 유학해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그리스-발칸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서 그리스 문화 관련 대표적 권위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는 특히 로마와 기독교에 의해 재해석된 그리스 신화를 넘어 고대 그리스 문화의 원형을 재구성해 소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서로는 '그리스:신화의 땅 인간의 나라' '그리스 신화의 세계 1;올림포스의 신들' '그리스 신화의 세계2:영웅 이야기' 등이 있다.

*** 바로잡습니다

8월 2일자 7면 '그리스 코드'시리즈 전문 중 올해는 근대올림픽 100년이 아닌 108년이기에 바로잡습니다. 제1회 근대올림픽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1896년에 열렸습니다.

아테네시는 100주년이 되는 1996년에 올림픽을 개최하려 했지만 로비 부족으로 미국 애틀랜타시에 개최권을 빼앗겼고 21세기를 여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2000년 올림픽도 호주 시드니로 넘어갔습니다.

아테네시는 애초에 의도했던 100년이 아닌 108년이 되는 올해 마침내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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