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먼저 건물의 이름을 짓는다, 그게 작업의 가늠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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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31면

김헌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가 중 하나다. 작은 주택, 근린상가, 리노베이션을 주로 해 왔던 건축가로 대단한 국가 프로젝트도 없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도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진지한 건축과 예술이 한국 사회에서 과연 소통이 가능한지를 가늠하는 시험 무대이기 때문이다. 건물에서 불꽃이 튀고, 삿갓과 코뿔소를 닮아야 건축이 대중과 소통한다고 생각하는 요즈음 김헌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드문 한국의 건축가다.

내가 본 건축가 김헌

김헌의 건축과 글이 어려워 그가 소통을 게을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은 소통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소통하며 건축주와 소통해야 한다. 그는 건축주와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갈등을 겪을 때가 있다. 건축주가 건축도면과 건축모형을 볼 줄 모른다면 건축가가 쉬운 말로 설명하고 예쁜 투시도를 그려 줄 수 있지만 그것은 소통을 하는 게 아니다. 동상이몽을 하면서도 이야기가 됐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도 김헌은 계속 이야기를 한다.

파주출판도시의 청림출판사와 같이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 이름을 붙인다. 이비뎀·세렌디피티·다이코그램 등등. 중요한 것은 이 어려운 이름들을 설계를 다 미친 뒤 붙이는 게 아니라 설계를 시작할 때 자신의 작업을 이끌어 가는 사유의 가늠자라는 사실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작품의 ‘제목’이 아니라 ‘작업 어휘’다. 김헌은 자신의 작업과 건축관에 대해 가장 세심하게 글을 쓰는 건축가다. 그가 건물에 이름을 붙이고 글을 쓰는 것은 비평가와 독자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비평가에서 기성 건축가, 건축 지망생부터 일반인까지 우리가 그의 건축과 글을 읽을 준비가 돼 있는지를 묻는다.

새로운 것, 자기만의 것, 그리고 의미 있는 것을 하고 싶은 젊은 건축가와 건축 지망생들은 널려 있다. 하지만 아무런 보장이 없는 작업을 위해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은 심오하지만 그것을 통해 건축으로 실현하는 힘을 가진 건축가는 얼마나 있을까. 김헌은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 우유부단하다는 편견을 깬다. 낯설지만, 과감한 그의 건축이 겸손한 그의 태도와 어긋난 듯하지만, 그 낯섦과 겸손함이 자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모순적 사고가 실천의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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