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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진 계급장과 보상금 기쁨도 잠시 …열 명 중 여덟 명은 브로커에게 돈 날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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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국군포로 귀환 생존자 63명의 힘겨운 삶… 본지 ‘3인의 하소연’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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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국군포로 김성동 씨가 자택 거실에 걸린 태극기를 바라보고 있다.

월간중앙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한 남자가 강을 건넜다. 길고 긴 세월 동안 그의 삶과 이름은 ‘포로’였다. 안전가옥을 소개받아 잠시 머무르다 보따리 하나만 들고 다시 발길을 옮긴다. 그러기를 수 차례….

보상금 많다고 아오지 탄광 수십 년 일해볼 텐가? # 허리 부상… ‘전쟁 중 상처’ 기록 없다며 상이군인 제외

‘혹시나 잡혀 다시 북송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만 여전히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도대체 며칠이나 지났을까? 남쪽의 가족 등이 도와 천신만고 끝에 고국행 티켓을 손에 넣는다.

국적기가 낯선 땅을 박차고 오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동안 속으로만 삭였던 울분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속으로 ‘만세’를 수십 번 외치고 또 외친다. 40여 년간 광산노동으로 얻은 육체의 고통도 이때만큼은 씻은 듯 나은 기분이었다.

1시간20여 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김포공항. 국가정보기관의 조사를 마치고 전쟁 당시 복무했던 소속 부대로 복귀해 다시 입은 전투복에는 특진 계급장이 박혀 있다.

더 이상 그는 포로가 아니다. 전역신고를 마친 그가 향한 곳은 사무치도록 그립던 고향마을.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의 둥지를 틀려던 찰나 문제가 발생한다. 포로기간을 포함한 복무 개월과 전공 등을 따져 나온 상당금액의 돈이 화근이 됐다. 먼저 중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소개받은 브로커로부터 연락이 온다.

잠시만 빌려 쓰겠다며 꾸어간 돈을 갚지 않는 친척도 있다. 북의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써야만 한다. 점점 줄어드는 돈과 씨름하며 그의 생활은 해가 갈수록 궁핍해지고 고령의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간다.

현재까지 79명 귀환해 16명 사망

6·25전쟁 당시 북한에 억류돼 국군포로로 살아야 했던 A씨의 사연이다. 한평생 한 맺힌 인생을 산 그의 삶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았다. 6·25국군포로가족회 이연순 대표에 따르면 귀환 국군포로 중 A씨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드물지 않다고 한다.

국군포로의 귀환은 현재진행형이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5월 한 국군포로가 중국 선양(瀋陽)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거쳐 고국의 품에 안겼다. 1994년 조창호(2006년 작고) 중위가 귀환한 이래 79번째로 돌아온 노병이다.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4년 14명을 정점으로 귀환 국군포로는 해마다 줄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7월13일 현재까지 3명이 돌아왔을 뿐이다. <그래프 참조>

그도 그럴 것이 북한 내 생존 국군포로가 급감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70대 후반~80대의 고령인데다 광산노동 등 험한 일을 하다 보니 돌아가신 분이 많고, 귀환할 만한 분은 사실상 거의 오신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귀환자 중에서 이미 사망한 사람도 여럿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모두 16명이다. 국군포로 명단 100여 명을 공개했던 ‘2호 귀환자’ 양순용 씨(1997년 귀환)의 경우 고향인 경남 함양군에서 생활하다 2001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존자 63명은 지금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공동의 문제를 안고 있다. 가장 큰 것은 바로 그들이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국가의 무관심. 귀환 직후에는 ‘돌아온 영웅’으로 대접했지만, 이후 그들이 정착하기까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귀환자의 특성상 오랜 기간 북한에서 살다 보니 모르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령자여서 새로운 것을 익히기에도 한계가 있다. 특히 금융과 관련해서는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 돈의 가치는 물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각종 ‘금전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2008년 11월 이후 귀환자부터는 국방부 주관으로 금융·법률상담 등 실생활에 꼭 필요한 교육을 두 달에 걸쳐 실시한다.

그러나 너무 늦게 시작한 탓에 이미 상당수는 고생을 겪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 대표는 “한 차례 전국을 돌며 조사한 결과 70~80%의 어르신이 정착자금을 갈취당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물론 예전과 달리 정부가 적극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귀환 과정에서 발생하던 여러 불상사가 대폭 줄었다.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속칭 ‘브로커비용’ 협상 등을 국방부·외교통상부 등 관련 부서가 적극 지원하면서부터다. 금액으로 따져 3,000만 원까지 선지원하고, 사후 귀환 지원금에서 감액하는 방식이다. 이는 국군포로 및 그 가족이 중국 주재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강제북송당하는 등의 사건이 불거지면서 제도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현재 귀환 국군포로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들 중에는 고향에서 행복한 노후를 누리는 사람도, 북에 두고 온 가족문제 등으로 노심초사하는 사람도, 그리고 전쟁과 노역의 상흔을 몸에 안은 채 힘겨운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도 있다.

<월간중앙>이 6·25국군포로가족회의 도움을 받아 귀환자 3명을 만났다. 지면에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인생역정은 기구했다. 세 사람 모두 언론에 노출될 경우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 및 지인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때문에 본명·나이·가족관계·거주지·직업 등 신변과 관련한 내용은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1 빛 바랜 무공훈장 단 김성동 씨

-“보상금 받기 위해 수십 년 탄광에서 일하겠나?”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김성동(78) 씨가 입대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겨울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춘천보충대를 거쳐 강원도 최전방에 배치됐다. 휴전을 한 달여 앞두고 큰 전투에 투입된 바로 그날 새벽 일이 터졌다.

상대하던 중공군이 총공세를 펼친 탓인지 유난히 대포 소리가 컸다고 한다. 포탄 한 발이 김씨가 있던 참호 속에 떨어져 그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 매몰됐다. 날이 밝자 그는 포로가 됐다.

“다행히 중공군이었으니 살았지, 인민군이었으면 아마 바로 죽었을 것입니다. 야전진료소로 데려가 치료도 해주더군요. 2주 정도 지났을까? 인민군 포로 집결소로 넘기더구먼. 한 600명 정도 모여 있었죠.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거기서 휴전된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며칠 지나자 불꽃 축제를 벌이는데, 옆에 있던 인민군 장교에게 물어보니 휴전해서 자기네가 승리했다는 의미로 평양에서 축포를 쏴 올린다는 거야. 그때만 해도 국제법대로 포로교환이 될 줄 알았죠. 그런데 그게 북한을 탈출할 때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포로 집결소에서 정치학습을 받은 김씨는 이후 평안북도 서쪽 끝에 있는 철산군의 한 광산을 거쳐 함경남도 단천군 금덕광산으로 이동했다. 아직 10월이었지만 얼음이 얼 정도로 날씨는 매서웠다. 이미 포로 교환이 끝난 시점이었다. 국군포로들은 생존을 위해 집부터 짓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인민군은 심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안전군관이 한 명씩 심문합디다. 계급은 뭐냐, 언제 입대했냐 등…. 자기들이 써먹기 위해 조사한 거죠. 살아온 과정, 일종의 자서전을 쓰고 또 쓰게 해서 진술이 틀리는지 확인하는 거지. 말 잘 들을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분한 셈이죠. 포로인데 왜 교환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당신들은 포로가 아니라 해방전사다. 해방전사이기 때문에 이제 여기서 교양을 받고 통일된 다음에 집으로 간다. 조금만 기다리면 통일이 된다’는 식으로 유혹하더군요. 그래도 정면으로 대드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로 끌고 가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1956년 말 김씨는 공민증을 받았다. 한마디로 북한의 정식 주민이 된 셈이었다. 이어 영구 정착을 위해 기업소에서 여자들을 알선해 집단결혼식을 시켰다고 한다. 이후에는 일 잘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당원에 가입시켜주는 등 유화정책도 펼쳤다.

“나도 그랬고, 북한에서는 만 60세까지 일을 시켜요. 그 자식들이 계속 광산에서 일하는 거지. 1980년대까지는 배급이 그런대로 잘됐어요.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자 식량이 부족해 정년퇴직자에게는 배급도 절반밖에 안 해주는 거야. 살아보려고 야산에 강냉이도 심고 해봤죠. 그렇게 노력해도 잘 안 되더라고.”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던 2000년 6월, 김씨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TV가 있는 곳으로 가 유심히 봤다. 하지만 국군포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때 내 나이가 69살이었는데, 남한 땅을 밟으려면 더 이상 국가에 기대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마지막 결심을 하고 중국을 왕래하는 보따리장수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새벽 2시쯤 두만강을 건너 당도한 곳은 한 조선족의 집. 서너 시간 후 러닝셔츠와 운동복 하의로 갈아 입고 중국 공안의 순찰을 피해 그는 또다시 장소를 옮겼다. 다음날 아침 조선족 브로커가 나타났다. 그런데 브로커들은 이미 그가 국군포로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주일 정도 지나자 남한 어디에 친척이 살고 있다고 알려주더구먼. 먼저 조카 한 명과 통화를 시켜주는데, 그 조카가 국방부에 통보한 모양이야. 그랬더니 국방부에서 데려오라고 한 것 같아요. 한 달쯤 뒤, 조카가 나를 데리러 중국에 왔어요. 그래서 비행기를 탈 수 있었죠.”

공항에는 가족이 마중나와 있었다. 거기에는 여행가는 줄로만 알고 따라 나온 아흔 살이 넘은 노모도 있었다. 정신은 또렷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늙은 아들을 알아보고 이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정보기관의 심사를 받았다. 진짜 국군포로인지 감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군포로로 증명된 김씨는 소속 부대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미 1954년 발급된 무공훈장을 달았다. 한동안 서울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지만 아들을 만나 염원을 이뤄서인지, 어머니는 반 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침 남동생이 인천에 살고 있는데 같이 살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얹혀 사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아파트를 얻어 혼자 살게 됐어요. 나는 무공훈장을 받아 매월 14만 원의 참전수당을 받고 있습니다. 훈장이 없는 사람들은 8만 원이죠.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도 있고 해서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은 없어요.”

하지만 이내 김씨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것은 그와 고난을 함께했던 전우를 향한 것이었다.

“귀환하면 그래도 국가에서 돈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북한에서 죽은 내 동료들, 그리고 그 유가족들에게는 제대로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또 사회의 인식도 좀 잘못돼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일례로 내가 참전 모임에 가 보면 사람들이 그래요. ‘여보쇼. 우리는 한 달에 8만 원 받는데, 당신네(귀환 국군포로)들은 정부에서 수억 원씩 받았다며’라는 식이죠. 그러면 내가 ‘당신은 그 돈 받기 위해 수십 년간 아오지 탄광에서 일해 보겠느냐’고 말해주죠. 북한에 국군포로가 수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미국은 전사자 유해 한 구를 돌려받기 위해 북한에 4,800만 원씩 줬다고 합디다.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그 정도 노력도 안 할 것이라면 유족에게라도 신경 써 줘야죠.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일반 새터민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2 참전 상흔 몸에 안고 사는 염수근 씨

- “50년도 넘은 중공군 야전병원 기록 어떻게 찾나?”

염수근 씨는 치열한 전투의 생존자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인민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다 그가 은신했던 참호가 무너지면서 허리를 다쳤다. 포로로 있으면서도 약 10개월간 치료받아야 했을 정도로 큰 상처였다.

2001년 귀환한 염씨는 현재 그가 나고 자란 경남 산청군의 고향마을에 살고 있다. 그는 24시간 복대를 착용해야 한다. 지팡이 없이는 집 밖을 나서기도 힘들 지경이라고 한다.

복무 중 상해를 입은 군인과 경찰을 일러 상이군경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참전 중 ‘진구성척추압박골절’을 당한 염씨는 상이군경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국가보훈처에서 나는 해당이 안 된다고 하네요. 왜 그런가 물어보니 전쟁 중 다쳤다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더구먼. 중공군 야전병원에서 치료받았는데, 어떻게 그 기록을 찾으라는 말인지….”

6·25국군포로가족회에 따르면 귀환 국군포로 중 일부만 상이군경의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대부분 기록이 없는 가운데 수류탄 파편이나 총탄이 몸에 남아 있는 경우 참전 중 부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상해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그러한 근거가 없으면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소송을 할까 생각도 해봤어요. 그런데 그 비용이 또 만만치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포기하고 사는 거죠. 자꾸 생각하면 나쁜 기억만 떠오르고…. 자기 집 개가 차에 치여도 소송까지 간다는 세상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정부에서 한다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염씨는 북에 있는 가족 중 몇 사람을 어렵사리 남한으로 데려왔다. 그러다 보니 보상금은 거의 브로커 비용으로 소진한 상태. 지금 사는 집도 연간 120만 원의 세를 주고 얻은 것이라고 했다. 북에서 온 아들 한 명이 일하며 번 돈을 얼마간 보태준다고도 말했다. 염씨의 아들은 북한에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국군포로의 자녀’라는 계급적 한계로 인해 대학에 갈 수 없었다.

“그래도 내려오기 잘했다고 생각해요. 여기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북한에 있을 때와는 천양지차거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학습회다 뭐다 해서 자꾸 불려가야 하고, 끼니 때우기도 힘들잖아요? 애들도 마찬가지죠. 한국 와서 힘든 막노동을 하지만, 그래도 데려오기를 잘한 거지. 어쨌든 여기서는 자기만 열심히 하면 먹고 살 수 있잖아요? 내가 우리 아들이 처음 왔을 때 강조한 것이 있어요. 너는 다른 탈북자와 달리 ‘국군포로의 자식’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염씨는 최근 한국의 사정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하거나 정부가 나서서 병역면제 혜택을 주는 현상을 꼬집었다.

“운동을 잘한다고 군 면제 혜택을 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또 군대를 안 가는 사람이 똑똑하다고 여기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니 북한에서 그러지 않습니까? 한국은 미군만 나가면 완전히 무너진다고 말이죠.”

3 브로커 농간에 돈 날리고 몸져 누운 한길수 씨

- “통일 되기 전 아이들 만나는 것 포기했다”

서울에 사는 국군포로 한길수(80) 씨는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쇠약해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수면제를 복용해야 겨우 잠들 정도라고 한다. 북한에 있는 가족이 걱정돼서다.

북한 최대의 철광산인 함경북도 무산군의 무산광산 출신인 한씨가 탈북한 것은 2002년. 북에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손주들을 둔 채 혈혈단신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쪽 사람이 고용한 북한 브로커가 찾아왔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국군포로인 줄 압디다. 그 사람이 제게 말하기를, 형제가 남한에 살아 있는데 혹시 만나보고 싶지 않으냐고 하더군요. 당연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들겠어요? 또 먹고 살기 힘드니 형제들에게 도움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따라 나선 거죠.”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남쪽으로 내려온 후 보상비를 노린 브로커의 농간이 시작됐다.

“브로커가 계속 괴롭히는 것입니다. 아내를 중국으로 데리고 나와 볼모로 잡고 돈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2,000만 원을 부쳐줬습니다. 빨리 남쪽으로 데려오라고요.”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브로커가 안전가옥이라며 숨겨준 집이 중국 공안에 발각됐고, 급기야 아내는 북송됐다. 한씨는 나중에 아내가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럼에도 한씨는 브로커에게 매달려야만 했다고 한다. 남은 딸 식구들이 눈에 밟혀서였다.

“돈을 많이 부쳐줬습니다. 어떻게든 좀 먹고 살게 해주려고요. 그런데 모든 것이 헛일이었습니다. 브로커들이 돈을 전달하지도 않고 마치 갖다준 것처럼 한 거죠. 이런 판국이니 억장이 안 무너지겠습니까?”

한씨는 브로커들이 처음부터 자신이 귀환 때 받을 보상비를 노리고 접근했다고 본다. 한씨를 괴롭히는 것은 브로커뿐만 아니었다. 남한의 친척들도 그의 보상비 중 일부를 빌려가 갚지 않고 있다.

“3,000만 원이다, 4,000만 원이다 해서 가져가 놓고는 갚을 생각을 안 합니다. 지금에서야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해줘서 알지만, 차용증이니 뭐니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이제 남은 돈도 얼마 없습니다.”

약 4억5,000만 원에 달하던 보상금도 점차 신기루처럼 사라져갔다. 게다가 자식 중 한 명이 아버지의 행적으로 인해 정치범수용소에 잡혀갔다는 소식마저 들려왔다. 끝간 데 모르고 이어지는 북한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행히 한씨는 보상금 중 1억 원을 예치하고 매달 연금 130만 원가량을 수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보루인 이 연금마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피까지 빨아먹을 것 같은 브로커들이 이 사실을 알면 또다시 남은 가족을 빌미로 괴롭힐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걱정만 하고 포기한 상황입니다. 통일 돼야 만나지, 이승에서야 어디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한씨는 철광산에서 근무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그는 남한에 내려와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포항제철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북한은 남한이 중공업 분야는 형편없다면서 제철소가 없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런데 내려와보니 제철소는 물론 조선소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하니 더 놀랐죠.”

이렇듯 한씨에게 돌아온 고국은 자랑스러운 나라다. 그러나 그는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의 한가운데에서 힘겨워하는 한씨. 이제 국군포로 귀환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숙제가 남아 있다. 특히 북에서 사망한 국군포로의 유해 반환문제가 그렇다. 굳이 미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억울한 평생을 보내야 했던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처우가 필요하지 않을까?

글 김상진 월간중앙 기자 [kine3@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월간중앙 사진기자 [lucid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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