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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집단입국 시대]下. 지원정책 새로 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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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 동남아에서 집단 입국한 탈북자들이 지난 28일 숙소인 경기도 안산시 중소기업연수원에서 신문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이곳에 한달간 머물며 조사를 받은 뒤 하나원으로 이동해 두달간 정착교육을 받게 된다.오종택 기자

탈북자 이경운(45.가명)씨는 지난해 3월 한국으로 왔다. 함경북도 출신인 이씨는 그해 2월 야음을 틈타 두만강을 건넌 뒤 다른 탈북자들 틈에 끼여 무작정 동남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곤 동남아 3개 국가의 국경을 잇따라 넘은 끝에 1만㎞를 돌고 돌아 한국땅을 밟았다.

하지만 남녘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탈북자 정착지원 시설인 하나원에서 두달간 적응교육을 받았지만 그야말로 맛보기에 불과했다.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하나원에서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르더군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생소했습니다."

이씨는 "적응교육기간이 너무 짧고, 내용도 대한민국 소개나 정서순화 교육 등에 치우쳐 취업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더라"며 "좀더 충분한 기간을 두고 보다 실용적인 '자본주의 학습'이 제공됐더라면 탈북자들이 훨씬 덜 고생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서울 강북에 거주하는 탈북자 김미영(43.여.가명)씨는 그동안 식당 주방에서 일하면서 네차례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적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김씨는 "탈북자를 두달간 기초교육만 시키고 아무런 생계대책도 없이 내보내는 것은 걸음마도 채 못 뗀 아이에게 나가서 돈을 벌어 오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1998년 이후 입국하는 탈북자 수는 매년 두배씩 늘고 있다. 올해는 벌써 1200명을 훌쩍 넘어서 연말까진 2000명선을 돌파할 전망이다.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는 5600여명. 이런 추세라면 2년 내 '탈북자 1만명 시대'를 맞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연착륙을 위한 우리 정부의 대응방식에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급증하는 탈북자들을 제대로 수용, 정착시키기 위해 정부 지원정책의 틀을 새로 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문제점은 뭔가=당장 수용시설을 확충하고 정착교육 시설 및 프로그램을 다양화.내실화하는 게 발등의 불이다. 현재 탈북자 수용 및 정착지원 시설은 하나원이 유일하다. 그나마 초창기엔 6개월 과정이었지만 탈북자가 급증하면서 2개월로 줄었다. 때문에 "이제 막 한국사회를 알 만해지니까 내보낸다"는 탈북자들의 볼멘소리가 많았다. 탈북자지원단체의 한 관계자는 "예전엔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1~2년 머물며 어느 정도 자본주의를 경험한 뒤 한국에 들어왔지만 최근엔 동남아를 경유해 곧바로 입국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한국사회에 대한 충격이 훨씬 큰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탈북자들의 성향이 변하고 있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특히 탈북 청소년의 경우 한국 내 정규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는 비율이 13.7%로, 일반학생의 10배나 되는 것으로 조사돼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또 최근 탈북자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 탈북자들을 위해 미용.요리.봉제.컴퓨터 등 자격증 취득과 취업으로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직업교육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예산 확보도 문제다. 탈북자들이 급증하면서 정착지원 예산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도 281억여원이 책정돼 있지만 턱없이 부족할 전망이다.

?정부 대책은 뭔가=정부도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 주재로 북한이탈주민 대책협의회를 본격 가동, 문제점 보완작업에 돌입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지난 27일 "탈북자 정책 전반을 재점검해 조만간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당장 수용시설 확충이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하나원 외에 제2, 제3의 정착지원 시설을 최대한 빨리 마련하기로 했다. 교육기간도 3개월로 늘리기로 했다. 정착지원금을 줄이고 취업격려금을 늘리는 방안도 내놨다. 통일부 고위당국자는 "탈북자 정책의 무게중심을 기존의 '보호'에서 '자활'로 옮기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지방자치단체 및 민간단체와의 역할분담 및 협조시스템 구축 방안도 적극 검토되고 있다. ▶기본교육은 중앙정부가 맡고 실질적인 직업훈련은 각 지자체에서 나눠 맡는 '독일식 정착 시스템'과▶민간단체 소속 정착 도우미들이 탈북자들의 초기 정착생활을 담당하고 정부는 신변보호에 전념하는 방안 등이 주요 연구대상이다. 내년 9월 개교를 목표로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특성화 학교를 세우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내년도 탈북자 관련 예산을 최대한 늘리기로 하고 구체적인 예산 확보 작업에 돌입할 계획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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