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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아기 16년 만에 알았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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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주부 박모씨는 지난해 고교생인 둘째 딸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다.

박씨와 남편은 B형이어서 친딸의 혈액형은 A형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B형 부부 사이에서는 B형 또는 O형 아기만 태어난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딸이 생물학적으로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박씨는 딸의 출생 과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지난 16년의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언제·어디에서 딸이 바뀌었을까”를 생각했다. 결국 출산 당시 경기도 구리시의 한 산부인과 간호사의 실수로 아이가 바뀌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태어난 또 다른 아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수소문 끝에 박씨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의 부모에게 사정을 말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한 친자 확인을 권했다. 하지만 검사 결과 친자 관계가 맞는 것으로 확인됐다. 박씨는 다시 실망했고, 검사를 받은 부모 또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초조함 등 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박씨는 병원에 “그 당시 출산한 산모들에 관한 정보를 모두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병원은 “분만기록정보 공개는 의료법에 저촉되고, 다른 산모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박씨는 “신생아들에 대한 분만기록정보를 공개하고 손해배상금을 달라”며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3부는 “병원은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로 박씨 가족에게 모두 7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9일 밝혔다.

재판부는 “태어난 신생아들을 주의 깊게 살펴 건강한 상태로 부모와 함께 각자의 가정으로 돌려보낼 의무를 소홀히 한 병원에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박씨와 가족들이 16년가량 서로를 친가족으로 알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실을 알게 돼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병원이 친자를 찾는 방법에 협조하지 않고, 설령 관련 정보를 제공받는다 해도 이들이 친자·친부모를 찾게 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며 병원에 배상금 지급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법원은 분만기록정보를 공개하라는 박씨의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병원이 기록을 공개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고 볼 수 없고, 박씨가 주장하는 행복추구권 등은 법률로 구체화되지 않아 기록 공개의 명분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박씨의 친딸 찾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병원 측 변호인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박씨의 딸이 바뀐 장소가 병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라며 “기록이 공개될 경우 박씨가 당시의 산모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 가족들에게까지 심한 정신적 고통을 줄 우려가 있다는 점을 꾸준히 주장했고, 법원도 심사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여준 것 같다”고 말했다.

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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