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영화사]11.독일 리펜슈탈 다큐멘터리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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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34년 9월4일부터 열흘간 독일 뉴렘베르크에서는 나치 (국가사회주의당) 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대회를 앞두고 히틀러는 레니 리펜슈탈 (1902~ ) 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을 관저로 불렀다.

무용가 출신인 그녀는 몇 해전부터 등산 기록영화를 찍어오고 있었다.

리펜슈탈이 32년에 주연.감독한 '푸른 빛' 이라는 작품을 보고 반한 히틀러는 그녀에게 이번 전당대회를 다큐멘터리로 찍어 줄 것을 요구했다.

물론 인적.물적인 지원은 아끼지 않았다.

카메라가 30대, 스테프들은 1백명이 넘었다.

'의지의 승리' 로 명명된 이 기록영화는 당연히 히틀러의 지도력을 부각시키고 독일 국민들의 일체감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을 띠었다.

35년3월29일 첫 시사가 끝난 뒤 히틀러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대중들을 선동하는 교육용으로서는 만점이었다.

히틀러가 비행기를 타고서 대회장으로 진입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화려한 행진과 열광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담아냄으로써 나치의 반대자들도 그 강렬한 영상효과만큼은 인정할 만큼 완성도가 뛰어났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도 찍게 된다.

1년6개월동안의 편집작업 끝에 완성된 이 작품 또한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독일인들은 "32년 LA 올림픽의 경우 할리우드의 본고장에서 열렸지만 '올림피아' 같은 기록영화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며 어깨를 으스댔다.

이번에도 나치 반대자들은 "영화적으로는 놀랍고 뛰어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아주 역겹다" 고 논평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리펜슈탈은 나치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됐으나 독일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녀는 "내 영화는 하나의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역사를 기록하는 증인이었을 뿐이었다" 며 정치적인 목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올림피아' 는 나치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한 푼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은 이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방해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증언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자료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리펜슈탈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노예무역을 다룬 다큐멘터리등을 찍으며 활동을 계속했고 72년엔 영국 신문 '더 타임즈' 의 주문으로 뮌헨 올림픽 기록사진을 찍기도 했다.

'의지의 승리' 와 '올림피아' 는 '영화의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더라도 그 영화가 미학적으로 뛰어나다면 관대하게 대해야 하느냐는, '순수' 와 '참여' 라는 예술에서의 해묵은 논쟁 말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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