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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명성황후'와 환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나는 2주 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흘린 눈물자국을 아직 지우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속의 강 (江) 이 된 그 눈물자국을. 눈물을 흘리게 만든 사람은 여럿 있다.

우선 명성황후 (明成皇后) . 19세기 말 쓰러져 가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로 일본의 침탈을 견제하다 일본 낭인 (浪人) 들의 칼에 숨진 후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황후로 추서된 비운의 인물이다.

그 명성황후가 약 1백년 뒤 한국의 뮤지컬극단 에이콤에 의해 브로드웨이에서 '부활' 했다.

링컨센터 스테이트시어터 무대에 오른 '명성황후' 는 세계질서의 요동 (搖動) 속에서 패망해간 한 왕조의 역사를 노래와 연기로 세계무대에 되살려냈다.

지난해 8월 '명성황후' 의 뉴욕 초연 (初演) 때도 호평을 아끼지 않았던 뉴욕 타임스는 올해도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국적 (國籍) 의 관객이라도 충분히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조선 국내정세를 다루고 있음에도 - ." 다음, 환란 (換亂) 을 초래한 우리들. 2천8백석의 객석을 거의 다 메웠던 서양 관객들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나에게는 1백년 전의 환란 (患亂) 과 지금의 환란 (換亂) 이 자꾸만 겹쳤다.

총칼로 국경 (國境) 을 새로 긋던 그때의 제국주의는 이제 국경 없는 시장의 통합 속에 진전되는 세계화로 바뀌었다.

그런 세계질서의 패러다임 변화에 적응 못한 우리도 후손들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선조들이다.

그러고도 여전히 당대 (當代) 의 자기 이익만 챙기느라 현대자동차 분규에서 보듯 노사 (勞使) 의 틀 하나 제대로 물려줄 생각을 못한다.

제 앞길도 못 가리는 정치가 또 끼어든 끝에. 끝으로, 세계 뮤지컬의 본바닥에 '명성황후' 를 올린 사람들. '명성황후' 는 동양의 뮤지컬로는 처음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세계적 전위예술가 백남준씨는 "예술에는 '비약' 이 힘든데도 배우들은 펄펄 잘도 뛰면서 '일' 을 저질렀다" 고 평했지만 '명성황후' 의 비약은 많은 사람들의 혁신.창의.협력.열정의 당연한 결과다.

우리 뮤지컬로 세계시장을 두드리겠다고 나선 연출가의 모험적 발상. 그의 뉴욕 연수를 도운 한 기업인의 연극에 대한 열정. 원작.작곡.작사자의 재능과 고통스런 작업. 집을 저당잡혀가며 자금을 댄 운영위원들의 추진력. 혹독한 연습을 견딘 단원들의 인내 - . '끼' 없이는 서로 만나지 못했을 이들이 '명성황후' 준비에 나선 것은 93년부터다.

세계화의 구호도, 광복 50년도 거론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요즘 세계무대에 뜬 몇 안되는 '한국산 (韓國産)' 이다.

이들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뉴욕 공연을 가진 것은 지난해 가까스로 열흘을 내주었던 링컨센터측이 뉴욕 타임스의 호평 이후 터진 관객을 보곤 올해의 '한달 공연' 을 먼저 제의했기 때문이었다.

대관 (貸館)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링컨센터가.

'명성황후' 는 내년 초 일본 진출도 거의 확정돼 있다.

1백년만에 명성황후가 일본에서 '세계성' 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1주일씩의 도쿄 (東京).오사카 (大阪) 공연을 초청한 측과 에이콤은 1억엔의 출연료를 놓고 막판 협상 중이다.

환란 속에서 '명성황후' 로 세계에 진출한 우리 뮤지컬은 환란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공허한 원론 (原論) 을 뛰어넘는 훌륭한 각론 (各論) 이다.

정부가 이른바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되풀이 강조하고 영화인들이 우리 영화는 이제 다 죽었다며 눈물을 흘릴 때 '명성황후' 는 브로드웨이에 도전했다.

문화에 대한 지원이나 긍지를 강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투적 귀결은 아직도 환란의 본질을 모르는 소리다.

환란 속의 '명성황후' 가 깨우쳐주는 것은 '시장의 가능성' 과 '투자의 안목' 이다.

바로 벤처 투자다.

'명성황후' 는 뉴욕 공연만으론 적자다.

그러나 뉴욕에서 인정받지 않고는 세계시장에 진입할 수 없고 뉴욕 타임스.링컨센터의 반응은 그 가능성을 열어줬다.

박세리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것과 같다.

에이콤은 이제 2000년을 내다보고 백제 도미부인 설화의 영어 버전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아기공룡 둘리' 와 '명성황후' 의 영어 버전도 구상 중이라고 한다.

여기에 한가지 빠진 것이 안목있는 자본의 투자다.

" '타이타닉' 은 값진 경영교재" 란 원론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돈 될 각론에 열심히 달라붙어야 한다.

김수길(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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