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그린수기]30.오르막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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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번 브리티시여자오픈을 치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한국에 있을 때 날마다 반복된 15층 계단 오르기에서 이제 올라간 계단을 다시 내려오는 기분이다.

그러나 뒷걸음질해 내려오는 것은 다시 오르기 위해서가 아닌가.

골프라는 것이 이렇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것임을 다시금 느낀다.

지난 5월 LPGA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 전에도 나는 잇따른 침체기가 있었다.

지난해 8월 미국 프로테스트에서 1위로 통과할 때만 해도 국내 언론이나 내 자신도 한창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긴장이 해이해진 탓일까 프로가 된 뒤 올해 출전한 대회마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아직 적응이 안됐으니까 기다려 보자" 는 말도 있었으나 내 자신이 만족할 수 없었다.

9개 대회에 참가해 1월의 헬스사우스 이너규럴대회 공동 13위, 4월초 롱스드럭스챌린지대회 단독 11위를 제외하고는 별볼일 없는 성적이었다.더구나 2월의 컵누들스 하와이언오픈에서는 예선탈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겪고 말았다.

언론에서는 내 부진한 성적을 나름대로 분석하며 우려를 표했고 삼성측에서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언론보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마디로 바늘방석이었다.

5월초의 타이틀홀더스챔피언십대회에서 공동 43위, LPGA선수권 바로 전번주에 열린 사라리클래식대회에서도 공동 32위밖에 안되었다.

아버지는 대회 성적을 듣고 전화로 "국내에서 좀 쉬게 하면 어떻겠느냐" 는 삼성측의 제안을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직 시간이 많으니 골프는 천천히 해도 된다" 며 "집에서 낚시질이나 실컷 하자" 고 나를 위로했다.

아버지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아버지는 나에게 여유를 보이시면서도 삼성측에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 세리는 향수병에 걸린 거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로 부모품을 그리워할 때가 아니냐" 고 설득하셨다고 한다.

그러자 삼성측은 LPGA선수권대회까지 기다려보자고 최종 합의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당시 경기가 잘 안풀리니까 집 생각이 자주 났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언니와 동생에게 칭얼대기도 했다.

전화 거는 횟수도 많아지고 마음도 점점 약해져 갔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다.

이렇게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가 다시금 끓어올랐다.

나는 LPGA선수권이 마지막 대회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귀국설을 거론했던 삼성측이 나를 기다려 주었고 나는 그 기다림에 보답이라도 하듯 우승행진을 하게 됐다.

내가 부진했던 때 나를 믿고 기다려주었던 고국의 팬들과 삼성 관계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듯 나 역시 어려운 시절에 나를 도와주고 애정을 보내주셨던 분들의 고마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산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장 큰 격려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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