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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읽는다] 몽골제국과 고려, 그리고 한·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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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과 고려-쿠빌라이 정권의 탄생과 고려의 정치적 위상』
김호동
서울대학교출판부, 146p, 8,000원, 2007

얼마전 소설가 황석영씨가 알타이문화연합론, 몽골+2코리아 통합론을 주장해 화제가 된 바 있다. 한-몽 국가연합 구상까지 거론 되기도 했다. 이렇듯 몽골이 부상하는 요즘 2년 전 출판된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서울대학에서 진행한 ‘한국학 장기기초연구 지원사업’의 하나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사 전문가인 김호동 동양사학과 교수가 펴낸『몽골제국과 고려』라는 제목의 책이다.
고려는 30여년 동안 강화도를 제외한 전국토가 몽골군 말발굽에 유린당했다. 이 책은 여몽전쟁 직후의 양국관계를 세계사적 시각에서 파헤치고 있다. 김 교수는 고려가 ‘국왕’으로서의 독자성과 ‘부마’로서의 종속성이라는 정치적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몽골과 고려 관계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몽 관계 뿐만 아니라 한·중 관계 정립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려는 어떻게 13~14세기 동안 대원제국을 상대로 독립과 종속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김 교수의 논리를 따라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저자는 몽골제국의 4대 군주 뭉케 카안이 남송 정벌 도중인 1259년 조어산(釣魚山)에서 급사한 시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뭉케가 죽자 칭기스 칸이 세운 대몽골 제국의 패권을 놓고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사이에 치열한 계승분쟁이 시작된다. 쿠빌라이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대칸의 직접적인 지배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계승 분쟁의 경쟁자 아릭 부케를 물리친다. 김 교수는 쿠빌라이의 승리는 군사력의 승리라기 보다 전략과 외교의 승리였다고 평가한다. 아릭 부케는 1264년 쿠빌라이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투항한다. 쿠빌라이는 이 승리를 위해 서방의 제왕들에게 제국의 분할통치를 위임했다. 이로써 단일한 제국으로서의 ‘대몽골 울루스(ulus, 관할하의 인민을 뜻하는 말로 국가라는 의미의 몽고어)’는 동아시아와 몽골 초원으로 축소된 ‘쿠빌라이 울루스’로 전환됐다.
그렇다면 고려는 쿠빌라이 울루스에 어떤 식으로 결합했던 것일까? 여기에 고려의 위상을 결정지은 키포인트가 숨어있다. 칭기스 칸에 이은 2대 카안 우구데이는 1231년부터 고려 정벌전을 시작했다. 고려는 1259년 최씨정권이 무너지자 몽골에 투항을 결정하고 태자 전(전)을 몽고로 보낸다. 고려 태자는 뭉케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중원이 패권을 둘러싼 일촉즉발의 격변기에 돌입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쿠빌라이를 만났으나 신속(臣屬)의 뜻은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부친인 고종의 사망을 이유로 귀국한다. 이 과정에서 쿠빌라이측의 회유공작이 펼쳐졌다. 세자는 귀환한 뒤 원종으로 즉위한다. 이후 사절단을 보내 신속의 조건으로 여섯 가지 사항을 요구해 모두 쟁취한다. 쿠빌라이는 당시 “고려는 만 리 밖에 있는 나라로서, 당태종이 친정을 했어도 복속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세자가 내게 내귀(來歸)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말할 정도로 고려의 투항을 반겼다. 고려의 쿠빌라이에 대한 ‘편승(Bandwagon)’ 전략은 절묘한 타이밍으로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후 고려는 다시 몽골 황실과 혼인을 통해 부마국 지위를 얻는다. 이 과정에는 1269년 임연의 쿠데타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남송 공략 총력전을 펼치던 쿠빌라이는 쿠데타로 인한 고려와 남송 연맹의 출현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에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진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려왕실은 몽고 황가에 청혼을 제안했다. 하지만 임연의 쿠데타가 쉽게 진압되자 쿠빌라이는 혼사에 대해 신중한 태도로 돌변한다. 이 때 쿠빌라이의 결정을 이끌어 내는 사건이 발생하니 바로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의 난’이다. 삼별초 사건은 쿠빌라이에게 고려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한반도에 반몽세력이 존재하면 일본, 남송 정벌에 심각한 차질이 벌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1271년 청혼을 수락하고 1274년6월16일 쿠빌라이 친딸 쿠틀룩 켈미시와 고려 세자 심은 혼례를 올린다. 쿠빌라이는 1281년 충렬왕에게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을 하사한다. 이후 고려의 국왕은 대칸이 개최하는 연회에 사위의 자격으로 참석하여 웬만한 제왕들보다 상위의 좌석에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칸의 계승분쟁에도 깊숙이 간여하여 제국 정치의 핵심적인 부분에 접근한다.
이상 저자는 쿠빌라이의 집권과정에서 고려의 역할을 추적해 여몽관계의 골간을 이룬 정치적 이중성의 뿌리를 밝혀냈다.
최근 중국의 굴기를 보며 한국은 21세기판 ‘조선책략’ 수립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이와 관련 750여 년전 고려 왕실이 택한 ‘결단’을 우리 후손들은 간단하게 보고 넘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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