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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브 벡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2호 33면

중국 서북부, 톈산산맥 남쪽에 살던 터키계 유목민 회홀(回紇)인들은 원래 불교도였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래서 중국에선 이슬람교를 회홀인이 믿는 종교라고 해서 ‘회교’라고 불렀다. 13세기 이래 이들은 위구르인으로 불렸다. 한자로 유오이(維吾爾)라고 쓴다. 중국에선 회민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이 사는 지역을 회부라고 했는데, 지금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가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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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759년 만주족의 청나라에 의해 중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나라가 잠시 지배하다 8세기에 티베트가 점령하면서 떨어져나간 뒤 장장 1000년 만에 다시 중국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 뒤 태평천국의 난으로 중앙정부의 힘이 빠지자 1864년 만주족 관리들을 내쫓고 독립 정권을 세웠다.

중국 역사학자 바이양(柏楊)에 따르면 당시 세금 징수원이던 마금·마팔이 혹독하게 굴자 한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마금·마팔은 적반하장 격으로 ‘한족들이 계획적으로 이슬람교도들을 말살하려 든다’고 주장하면서 무력항쟁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유혈사태가 발생해 혼란스러워지자 그 틈을 타서 현지인 관리가 독립정권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곧 권력 투쟁이 벌어져 이웃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무장 야쿠브 벡이 정권을 잡았다. 그는 당시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1872년 러시아, 1874년 영국의 승인을 받았다. 수도인 카슈가르에 영국영사관도 유치했다.

그는 계책을 하나 냈다. 당시 이슬람 세계와 터키계의 종주국이던 오스만 튀르크에 사절을 보내 나라를 바치겠다고 한 것이다. 수천㎞ 떨어진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 속국이 되어 외교·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왕권을 유지하려는 술수였다. 오스만의 술탄(정교 일치의 이슬람 군주) 압둘아지즈는 그를 신하로 받아들이고 아미르(군주)라는 호칭을 하사했다. 사절은 대포와 총, 그리고 황금과 은덩이를 받고 돌아갔다. 1873년의 일이다.

그동안 청나라 정부는 양분됐다. 해양의 방어가 급하니 독립을 인정하고 조공이나 받자는 해방파와, 변방부터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색방파로 나뉘었다. 결국 색방파의 지도자 좌종당이 정벌에 나서 주요 거점인 우루무치를 점령했다. 야쿠브 벡의 독립을 요구하는 영국의 요구 앞에 좌종당은 “영국이 그토록 그들을 아낀다면 왜 인도를 그들에게 떼어주지 않는가”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영국은 등을 돌렸다. 홍콩에 거점을 둔 보스턴은행을 통해 군자금을 대출해 주면서 청나라를 지원한 것이다. 힘의 공백을 이용해 자칫 러시아가 신장을 차지할까 봐 차라리 중국을 지원한 것이다. 결국 신장은 1884년 11월 다시 중국의 손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그 기회를 틈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합병했다.

청나라가 공격해 오는 가운데 야쿠브 벡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들은 권력을 놓고 골육상쟁을 벌였다. 청나라는 이들을 쉽게 정벌했다. 외세의 배신과 내분 속에 독립정권은 짧은 생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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