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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갤러리 '조선후기 국보전'을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눈이 멀 일이다. 여기서 더 발을 내디딜 수 없는 벼랑 앞에 서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잊고 살았던, 내가 어디서 왔는가를 모르고 살았던 지난 시간의 빛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일이다.

아니 어릴 때 코끝에 배어오던 묵향 (墨香) 이며 뒤주 위에 앉아 있던 백자 항아리가 무엇을 담고 있었던 것이었는지 뒤늦게 가슴에 아려오는 일이다.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후기 국보전' 은 고려나 조선전기의 문화유산들과는 또다른, 내가 자란 고향의 산과 들,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나 어머니의 손길 같은 사랑이 바로 배어나오는 아주 가깝고 따뜻하고 포근한 이 나라의 아름다움, 이 겨레의 슬기와 삶, 그리고 역사가 숨겨온 혼의 불꽃을 담은 신품 (神品) 들을 만나게 해준다.

겸재 (謙齋) 의 '금강전도 (金剛全圖)' (국보217호) 와 '봉래전도 (蓬萊全圖)' 앞에서 물소리 바람소리에 귀를 여는 것은 발길이 먼저 그곳에 가고 있기 때문 만은 아니며 단원 (檀園) 의 '군선도 (群仙圖)' (국보139호) 앞에서 넋을 잃는 것은 하늘을 휘어잡는 붓끝의 신명 때문 만은 아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나는 추사 (秋史) 의 '세한도 (歲寒圖)' (국보180호)가 누워 있는 유리 진열장에 이르러서 한동안 숨을 멎어야 했다.

귀신에라도 씌운 듯 추사에 홀려 '세한도' 를 머리 속에 담고 살아온 나로서는, 인사동이나 음식점에서 흔히 보는 인쇄물이 아닌 진본을 다시 언제 보랴 싶어 몇번이고 유리 진열장 위에서 손을 허위적거리기까지 했다.

조선백자의 절정은 아무래도 물감 하나도 몸에 묻히지 않고 흰 살로 빚어진 '백자 달항아리' 다. 누가 이 항아리 앞에서 이 나라를 작은 나라라고 하겠는가. 어느 역사.어느 예술이 백자 달항아리의 우주적 조형에 어깨를 견주랴. 피라미드도 만리장성도 이 크기와 높이에 무릎을 꿇을 일이다.

우리 보다 오랜 도자기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들을 다 제치고 국제경매시장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가장 높은 값을 부르고 있다.

요즘 골프.야구 등 우리의 젊은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힘을 겨루는 일에는 밤잠을 설치면서도 역사와 문화의 경지에서 으뜸으로 나서는 것에는 어찌하여 박수와 갈채를 보내지 못하는가.

내가 어디서 왔는가를 그리고 내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를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짧지만 긴 여행을 '조선후기 국보전' 은 내게 주었다.

(조선후기 국보전은 10월11일까지 열린다. 02 - 771 - 2381)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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