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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라흐마니노프를 사랑한 백건우, 러시아를 사로잡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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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백건우씨가 지난달 28, 29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더 그레이트 필하모니아 홀’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페스티벌’ 제공]

단 이틀. 보통의 피아니스트가 하루에 한 곡씩 공연하는 다섯 개의 작품을 백건우(62)씨가 연주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4곡)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지난 달 28, 29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했다.

라흐마니노프의 고국이자 ‘본고장’인 러시아 청중은 백건우의 연주에 사로잡혔다. 1500석의 ‘더 그레이트 필하모니아 홀’에는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음악팬의 요청으로 보조석은 물론 ‘입석’까지 생겼다. 좌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기 때문이다.

대부분 중·노년인 러시아 청중은 초반부터 연주에 압도돼 숨을 죽였다. 나는 한 젊은 여성이 연주 초반부터 우는 것을 봤다. 눈물을 삼키던 그 여성은 나중에는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다가, 청중의 기립박수 대열에 동참했다.

백건우가 들려준 섬세한 피아니즘의 극치는 객석에서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숨을 몰아쉬게 했다. 그는 끝없이 광활한 러시아 땅, 깊은 음울, 섬세한 서정을 한덩어리의 압축된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장중한 파워와 폭풍우같이 몰아치는 웅장함, 때로는 섬세하고 날렵한 핑거링(운지법)이 돋보였다. 가식, 조작적 감상이 없는 진실하고 농축된 힘이 러시아 대륙을 사로잡은 듯했다.

이 열기 속에서도 백건우는 담담했다. “좋은 협주곡 연주를 하려면 작품, 오케스트라, 지휘자, 피아노, 연주홀, 청중이 좋아야 하는데 이번이 그랬다”는 것이다.

지휘자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프조차 “러시아인보다 더 러시아적인 연주를 했다”라고 극찬한 데 대해서는 “러시아와 러시아인, 라흐마니노프를 사랑한 결과”라고 겸손해했다.

러시아인조차 감동시킨 라흐마니노프 음악회 현장을 보고 듣고 느낀 한국인들은 목이 메어 브라보를 외쳤다. 백건우가 러시아에서 연주한 것은 1993년 스피바코프 초청에 의한 첫 공연 이후 16번째였다.

이번 연주를 초청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제 페스티벌’은 백건우에게 내년 6월 쇼팽 탄생 200주년 축제에서의 쇼팽 연주를 부탁했다. 앞으로 그는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프랑스 디나르 음악제에서의 펜데레츠키 피아노 협주곡(8월 6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스칼라에서 테미르카노프 지휘로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2번(9월 4일) 연주를 앞두고 있다. 이때 다시 한번 러시아 음악의 진수를 들려줄 그에게 미리 경탄과 브라보를 보낸다.

신갑순‘삶과꿈 쳄버오페라 싱어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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