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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릴레마’에 빠진 미국경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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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미국 경제가 안팎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다. 전례 없는 경기부양책의 후유증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고용 사정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아 실업률이 2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밖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달러를 대신할 기축통화를 만들자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뾰쪽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실업률-인플레-환율’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어느 한쪽을 풀려다 보면 다른 한쪽이 엉켜버리는 이른바 ‘트릴레마’(Trilemma·세 가지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2차 부양책 쓰자니 눈덩이 재정적자에 물가 걱정

상승 분위기를 타고 있던 미국 경제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당초 예상보다 더 나빠진 고용사정이다. 미국 노동부가 이달 초 발표한 6월 실업률은 9.5%, 한 달간 사라진 일자리는 46만7000개에 달한다. 8일 미국은행가협회(ABA)가 집계한 1분기 신용카드 연체율도 6.6%로 전분기보다 1%포인트 넘게 뛰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실직 등으로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빚을 제때 갚지 못한 가계가 늘어난 것이다.

조 바이든 부통령이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경기부양책을 통과시킬 때 실업률이 두 자릿수 가까이 오를 것으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밝히면서 추가적인 경기부양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로라 타이슨 위원은 “1차 부양책의 규모가 작고 효과도 미미하다”며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는 2차 부양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추가 부양책 카드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손쉬운 방법이 자금을 추가로 푸는 것인데 눈덩이처럼 커지는 재정적자가 당장 부담이다. 최근 시장에서 미국 국채 가격이 급락한 것도 재정적자 우려 때문이었다.

인플레 대비하자니 돈줄 죄다가 경기 회복에 찬물

주요 원자재 가격이 올 들어 급등세를 타는 등 인플레이션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증시 추락에 돈을 걸어 100%가 넘는 수익을 올린 일명 ‘블랙 스완’ 헤지펀드는 초인플레이션에 대비한 펀드를 만들기도 했다. 모건스탠리 요하임 펠스 이코노미스트는 “대공황 이후 최장 기간의 부양책을 펼친 대가로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수준까지 끌어내리고 시장에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제는 위기 극복 이후의 인플레이션에 대비하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출구전략을 밀고 나갔다간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금리를 올리는 식으로 돈줄을 죌 경우 인플레이션 우려는 줄어들겠지만 경기가 급격히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플레이션을 잡자니 실업률이 걱정이고, 실업률을 낮추자니 인플레이션이 부담인 상황이다.

달러 약세 놔두자니 기축통화 논쟁에 기름 부을라

환율까지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중국·중동 등에서 최근 기축통화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달러 가치의 추가 하락을 막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이들 국가가 보유한 미국 채권 등 달러화 표시 자산은 수조 달러로 추산된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이들의 자산가치도 떨어지면서 손해를 보게 된다. 미국 입장에서도 이들 국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달러 가치의 상승은 또 다른 부담이다. 미국 제품이 가격 경쟁력을 잃는 것은 물론 수입품의 소비만 늘리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미국의 물가와 실업률이 안정되면 달러 가치가 상승하게 되는데, 이 경우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커지면서 경기가 다시 악화될 수도 있다”며 “약달러로 가는 게 미국 입장에선 유리하겠지만 정치·외교적 부담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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