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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중수부장 뭘 잘못했기에 사퇴하나

중앙일보

입력

‘박연차 리스트’ 수사를 이끌어온 이인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의 퇴진으로 대한민국 검찰의 역사는 또 한차례 얼룩을 남기게 됐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에 이어 이 중수부장까지 수사 지휘부가 모두 물러남으로써 검찰 스스로 수사가 부적절했음을 시인하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벌써 “표적·기획 수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책임자들의 사퇴가 당연하다는 반응과 함께 수사상황을 언론에 브리핑한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의 사퇴까지 압박하고 있다.

이 중수부장의 사표 제출로 노 전 대통령의 서거이후 촉발된 검찰 책임론의 불똥이 13일 열릴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로 옮겨 붙는 부담을 덜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실제 청문회를 단단히 벼르고 있던 민주당은 무려 26명의 증인·참고인을 요구했다가 이 중수부장이 사표를 제출하자 그와 홍 기획관, 임 전 총장 등을 뺀 6명으로 줄였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 가족은 물론 정치권·법원·검찰·경찰·청와대·국세청 등의 전·현직 고위층 인사들이 두루 연루된 대형 로비의혹 사건 수사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 수사 도중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난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온 국민의 이목이 쏠렸던 수사에서 뭐하나 제대로 캐낸 것도 없이 수사 책임자들만 물러나는 것은 아무래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검찰 스스로도 이럴 거면 뭐 하러 수사를 시작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검찰이 자초한 측면이 많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등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수사는 결국 부메랑이 돼 검찰의 발목을 잡았다. 증거를 확보하지도 못한 채 박 전 회장의 진술에만 기댄 수사는 살아있는 권력은커녕 죽은 권력의 허물조차 들춰내지 못하고 중수부 해체론만 가열시켰다.

실제 빈 수레가 요란한 것처럼 검찰총장의 지휘 아래 중수부가 맡은 대형 사건들 중에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1998년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에 환란 책임을 지워 기소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고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과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국장의 뇌물수수 사건, 한국석유공사와 강원랜드 등 공기업 비리 의혹 사건에서 잇따라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렇다고 중수부 해체가 능사는 아니다. 늘 그렇듯 제도보다는 운영이 중요하다. 여전히 투명하지 않은 구석이 많은 우리 사회 현실 속에서 중수부는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데 큰 몫 할 수 있는 기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주문하듯 정치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검찰의 각오가 필요하다. 아이러니지만 임 전 총장의 퇴임사에 그 답이 있다. “강한 검찰이 아닌 바른 검찰, 원칙과 정도, 절제된 검찰권 행사, 인권을 존중하는 품격 높은 수사.” 이런 모습의 검찰상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긴다면 오늘의 불명예를 극복하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검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