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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림의 300mm 인터뷰 ④] 박경림 “2002년 월드컵을 회상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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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 정말이지 그때 우린 모두 미쳐있었다. 16강이라는 기적 같은 꿈을 깨기도 전에 8강, 4강이라는 큰 선물이 우리 국민들에게 찾아왔다. 온 동네가 함성으로 매일매일 가득해졌고, '짝짝짝 짝짝 대~한민국'에 맞춘 자동차 경적소리가 마치 모차르트의 교향곡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언제나 짜릿하고 행복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있다. 산타클로스처럼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을 마술이라도 부리듯 우리에게 안겨준 그와의 만남은 4강 신화를 이룬 월드컵 직후였다.

태극 전사들을 위한 해단식 행사에 나는 가수 자격으로 초대돼 공연을 하러 갔다. 행사장에는 선수들과 가족들, 코칭 스태프들 그리고 축구협회 관계자들이 함께있었다. 서로들 사진을 찍기 위해, 사인을 받기 위해, 인사를 하기 위해 행사장은 그야말로 어수선했다.

당시 이목을 집중하기에 충분했던(?) 나의 불후의 명곡 '착각의 늪'이 흘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관심없는 표정~'이라는 내 노래 첫소절이 나오면 으레 쉼표에 맞춰 '박경림!' 이라는 구호가 나오기 마련인데 그날은 정말 모두가 나에겐 관심없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많이 '뻘쭘'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선 나 역시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굉장히 즐겁다. 나로 하여금 사람들도 즐겁다'라며 최면을 걸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마음의 다른 한편엔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역시 홍명보·황선홍 선수와 사진을 찍고 싶었고, '그라운드를 벗어난 영웅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과 얘기하면 어떤 재미와 감동이 있을까' 궁금해 노래 부르는 내내 힐끔 힐끔 선수들을 쳐다봤다.

당시 그들의 인기는 대한민국 최고였다. 가족들도 다른 선수들을 볼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수선한 건 당연한 거였다. 모든 걸 체념하고 빨리 노래가 끝나길 바라는 나에게 순간 누군가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분명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인 공세를 받았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음에도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학예회 발표회에 오른 학생처럼 더 열심히 오버해서 춤을 추고 노래했다. 노래가 끝나고 나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이미 그 테이블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 있었다. 그냥 고마운 마음만 간직한 채 행사장을 나와야만 했다.

그는 바로 히딩크 감독이었다. 몇 년이 지나 나는 우연히 축구협회 실장님의 초대로 다시 히딩크 감독을 만나게 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그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고, 나는 휴대용 PMP에 2002 월드컵 경기와 유로 2004, 내가 출연한 버라이어티 프로, 히딩크 감독님이 좋아한다던 영화 '대부' 시리즈를 넣어서 선물했다.

선물을 전하면서 나는 그때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전했고, 히딩크는 '사실 그날 행사에서 저 사람이 가수인지 코미디언인지 헷갈렸다'며 관찰했다고 털어놓았다. 옆에 있던 연인 엘리자베스는 내게 줄 답례용 선물을 준비하지 못 했다며 네덜란드에 꼭 놀러오라고 했다. 내게 주소와 연락처까지 알려줬다. 본인들이 하는 히딩크 장애우 축구장에도 함께 해달라고 덧붙였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우린 그렇게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가 됐다.

올해로 히딩크 드림필드 오픈식을 함께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참 많은 걸 보여줬다. 러시아와 호주에서, 그리고 영국 첼시에서 그는 여전히 녹슬지 않은 '매직'을 보여줬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다시 한국을 방문해 자신이 했던 약속을 하나하나 지켜나가고 있다.

솔직히 그에 대한 첫인상은 좀 무섭고 차가웠다. 특히 무표정한 표정이 그랬다. 그러나 역시 속단은 금물. 그는 한국인의 끈끈한 정을 듬뿍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모든 걸 다 보고 있고, 원칙을 중요시하면서도 힘든 사람을 가슴으로 챙기는 살가운 면이 있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행사를 마치고 우리는 같이 점심을 먹었다. 히딩크 감독과 나는 바로 옆자리에 앉았고 감독님의 질문에 내가 영어로 답을 했다.

사실 내 영어가 프리토킹 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에게 "영어를 안 쓰다보니 잘 모르겠다. 지금 영어가 엉망진창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영어를 어떻게 하든 너의 진심은 내게 다 전달된다."

내가 축구선수는 아니지만 그의 스타일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얘기였다. 그는 상대를 진심으로 믿어주고 사랑한다. 거기에 덤으로 유머 감각까지 있다. 그것도 웃음없는 무표정으로. 후덜덜 ㅋㅋㅋ. 나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뷰티풀'을 연발하니 이 얼마나 뛰어난 유머 감각인가.

전주로 가는 KTX. 그는 진정한 프로이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몇 년 뒤 재회하면 그는 우리에게 또 어떤 마술을 보여줄까.

[J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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