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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재테크]2.“못믿을 곳엔 신탁 말랬더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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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수수해씨는 머리띠를 질끈 둘러맸다. 어제밤 남편 전재산씨와의 열전은 수수해씨에게 더이상 남편만 달랑 믿고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그래, 결심했어. 내가 나서야 해. 국난때면 여자들이 더 애국충정에 나섰던게 우리 역사잖아. 우리 가계를 IMF위기에서 건질 사람은 역시 나밖에 없어. "

남편과 대판 설전을 벌인 뒤 뜬 눈으로 남편이 보던 '재테크 비법' 이란 책을 독파한 수수해씨였다. 요즘 세상 언제 직장에서 잘릴지 모른다며 남편 전재산씨는 매일 '돈버는 책' 만 봤다.

'재테크 왕도' '떼돈벌기 부동산' '주식투자정석' '금융상품대해부' 등등…. 책장 빼곡히 꽂힌 재테크책들을 보던 수수해씨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쩜 저렇게 공부를 하고도 맨날 털어먹기만 하느냐 말야. 몇달전엔 주가지수 선물인지 뭔지에 빠져 3천만원을 일주일만에 날리더니 이번엔 뭐가 잘났다고 낼름 퇴출은행 주식을 사가지곤 몽땅 휴지조각으로 만드냔 말이야. " 화장을 고치며 여의도 대박증권사를 찾아나서는 수수해씨의 얼굴엔 사뭇 비장감이 감돌았다.

이제 집에 가진 돈이라곤 한푼도 없었다. 결혼 10년동안 알뜰히 모았던 가계자금은 꼭 여섯달만에 남편이 홀랑 들어먹었다. 그것도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수수해씨는 손에 쥔 통장을 다시 한번 꼭 움켜쥐었다.

손때 묻은 통장엔 처녀때부터 남편도 모르게 모아온 비자금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쓰러져가는 우리 가계를 되살릴 마지막 비약 (秘藥) 이었다.

"아, 그러니까 진작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이자 조금 더 준다고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부실은행에 돈 맡기는 건 위험하다고. 특히 신탁은 더 안된다고. " 재택구가 전화통을 붙잡고 열을 올리는 모습이 들어왔다.수수해씨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재택구 앞으로 다가섰다.

"아니, 수해씨가 여긴 웬일이세요? 이거 오늘 내가 횡재를 할 운수인가보다.

수해씨가 다 나를 찾아주고. 잠깐만 기다려요. " 재택구가 수화기를 잠시 손으로 막으며 반겼다. 안심이 됐다.

남편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대박증권사의 팜 (개인자산운용가) 인 재택구는 지금부터 수수해가 벌일 '대 (大)가계회생전쟁' 의 유일한 원군이었다.

"아, 글쎄 신탁이란게 뭐예요, '믿을 신 (信) 맡길 탁 (託)' 바로 믿고 맡긴다는 뜻 아닙니까? 믿고 맡긴다는게 뭡니까. 말그대로 돈굴린 사람이 잃든 따든 맡긴 사람은 상관않겠다는 것이잖아요. 바꿔 말해 '믿을 수 없으면 맡기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씀이에요.

100원 맡겼으니 100원이상 돌려주라? 그게 웃기는 소리지요, 그럴려면 처음부터 믿지 말거나 맡기지 말았어야지. 어쨌든 알아서 하세요. 계속 부실은행 신탁에다 돈을 넣어두시든지 꺼내서 우량은행에다 옮기시든지. "

분이 안풀린다는 듯 씩씩거리던 재택구가 수수해씨를 보고 아차 싶었던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아이쿠, 원. 수해씨가 계신데 내가 그만 추태를 보였네요. 그래 어쩐일로?" "재택구씨한테 재테크 비법 좀 전수받으려고 왔어요. 요즘은 도대체 돈을 어디다 어떻게 굴려야 할지 도통 모르겠어서요. 그런데 방금 통화를 들으니 신탁이 그렇게 위험한가요?"

"본래 신탁은 원리금 보장이 안돼요. 버는 대로, 잃는 대로 찾아가는거지요. 그런데 고객들이 아직 그걸 잘 몰라요. 이건 비밀인데요, 정부는 본래 이번 5개 퇴출은행의 신탁상품부터 원리금 보장을 안해주려고 했었대요. 그런데 그랬다가 전금융기관에 신탁든 고객들이 맡긴 돈 찾으려고 와 몰려들면 난리가 날까봐 일부 보전을 해주기로 급선회했대요. 하지만 앞으론 절대 망한 금융기관의 신탁상품 원리금 보장을 안해줄 방침이래요. 그럴 돈도 없고, 국민들 계몽도 시킬 겸. "

"그럼 이제 신탁든 사람들은 재수없으면 원금까지 홀랑 날릴 수도 있겠네요?" "물론이죠. 신탁은 본래 주식처럼 '고위험 고수익' 상품이에요. 이자 많이 주는 만큼 위험한게 당연하죠. 세상에 안전하고도 수익높은 금융상품은 없어요. 주식뿐아니라 '은행도 자기책임과 판단하에' 선택하는 시대가 왔다는 얘깁니다."

"어떤 은행.어떤 상품이 안전한지는 어떻게 판단하죠?" "우선 BIS비율이 높은 은행을 골라야죠. BIS비율이란 국제결제은행이 정한 은행 건전성 지표에요. 사람으로 치면 건강진단서인 셈이죠. 이게 8%가 넘으면 안심해도 된다는 거죠. " "다음은요?"

"주가를 비교하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아무래도 좋은 은행 주식이 인기가 있고 주가도 높죠. " "또 있어요?" "이익을 많이 내는 은행을 찾아야죠. 그건 쉽게 알기 어려우니까 은행에다 직접 물어보든지 신문에 관련기사가 날 때마다 유심히 챙겨둬야죠. "

"그렇게 노력하는게 이른바 '자기책임과 판단' 이란 얘기군요. " "역시 수해씨는 척하면 척이라니까. 맞아요, 그런 얘기죠. " "그나저나 제게 돈이 조금 있어요. 이걸 어떻게 굴리는게 제일 좋을까요? 사실은 그걸 물어보러 왔어요. "

이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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