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박사의 비망록에 나타난 제헌 당시 최대쟁점은 크게 두가지. 하나는 용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제헌의원들 사이에 벌어진 첫번째 논쟁은 영어의 '피플' (people) 을 '인민' 과 '국민' 가운데 어느 것으로 할 것인가 하는 점. 비망록에 따르면 48년 6월초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된 헌법초안에는 일괄적으로 '인민' 이란 용어가 사용됐다.
예컨대 "한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 (發) 한다" (제1장 제2조) 고 돼 있었다.
이를 문제삼은 대표적인 의원은 윤치영 (尹致暎.작고) 씨. 6.25때 분실됐다 이번에 兪박사의 유품에서 발견된 당시 '국회 속기록' 에 따르면, 그는 국회 본회의 발언을 통해 " '인민' 이라는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어째서 그런 말을 쓰려느냐" 며 "그런 말을 쓰려는 사람의 사상이 의심스럽다" 고 공박했다.
이에 조봉암 (曺奉岩.작고) 의원이 " '인민' 은 미국.프랑스.소련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단지 공산당이 쓰니까 기피하자는 것은 고루한 편견일 뿐" 이라며 즉각 반격에 나섰다.
46년 6월 제헌의원에 당선되기 직전 그는 일제 때부터 핵심 인물로 활동해 왔던 조선공산당과 결별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세계 곳곳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이 극심했던 터라 제헌의원들은 결국 '국민' 을 선택하게 됐다.
兪박사는 회고록에서 " '국민' 은 '국가의 구성원' 이라는 뜻으로 국가 우월주의 냄새가 풍기는 반면, '인민' 은 '국가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 를 의미한다" 고 정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단어 하나를 빼앗겼다" 며 아쉬워 했다.
또하나의 쟁점은 '내각제냐 대통령제냐' 를 놓고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 (李承晩) 과 김성수 (金性洙) 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 계열 의원들간에 벌어진 권력구조에 관한 논쟁. 兪박사의 비망록은 당시 뒷얘기들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헌법기초위가 내각제로 된 헌법초안 심의를 끝내고 본회의 상정을 불과 이틀 앞둔 48년 6월 21일 이승만은 갑자기 위원회를 방문, "내각제 헌법하에서는 어떤 자리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 며 내각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들의 힘겨루기는 한민당이 이승만의 고집을 꺾지 못해 21일 밤 대통령제를 수용키로 결정함으로써 결국 이승만의 승리로 끝났다.
이동현 전문기자